유영선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동양일보]9월3일 일요일 저녁,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주변엔 깔끔하게 머리를 묶어 올린 여학생들이 떼를 지어 돌아다니고 있었다. 교복이 각각 다른 것을 보면 여러 학교의 학생들 같아 보였다. 무대에 오를 학생들 같아서 공연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무용공연을 보기 위해 온 예술고등학교 학생들이라고 했다. 7시 공연시간에 맞춰 아르코예술극장 대공연장으로 들어서니 거리에서 만났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우리는 같은 공연을 보러 온 관객들이었던 것이다.

공연장은 매진, 만석이었다. 다음날 아침 떠나야하는 비행기 짐도 꾸리지 않은 채 달려간 공연은 ‘박재희춤 60년, 舞춤속의 사람中人’공연이었다.

춤 인생 60년이라니. 한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한 가지 일에만 온 힘을 온전히 쏟을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을까. 고행의 길이었을까.

국가무형문화재 박재희 무용인. 늘 접근하기 어려운 무대 위 무용수의 모습이거나, 엄격한 자세로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수의 모습으로만 기억되던 그를 제대로 이해하게 된 것은 지난해 청주문화재단 프로젝트인 ‘원로예술인구술채록’ 대상자로 그를 만나고 나서였다. 어릴 때부터 그는 무용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6~7세때 쯤 부채춤 영상을 본 이후 무용에 대한 갈망은 한순간도 변하지 않았다. 그의 춤 방향이 결정된 것은 한영숙 선생을 만나고 나서부터다. 대학 4학년때 강사였던 한영숙 선생이 추는 ‘태평무’를 보고 ‘저런 춤이 있구나’하며 그대로 빠져들었다. 그로부터 46년 만에 그는 마침내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 보유자가 되었다. 1900년대 한성준 선생이 만든 ‘왕의 춤’태평무의 초대 보유자가 된 것이다.

이날 아르코의 공연에서는 박재희 교수의 네 제자가 무대에 올랐다. 김진미, 손혜영, 홍지영, 박시종 등. 이들은 춤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과 그 인연들을 기억하며 춤으로 되돌려 드린다는 의미로 무대에 섰다. 박재희 교수 춤의 회향(廻向-자기가 닦은 공덕을 다른 이들에게 돌려드림)이며 스승과 제자가 같이 가는 사제동행인 셈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날 공연은 설렘보다는 불안이 더 컸다. 박 교수의 몸 상태를 아는 사람들은 손에 땀을 쥐고 있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병원에 입원 중이었던 박 교수가 공연장에 나올 수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의사의 허락을 얻어 공연장에 왔다는 전언을 듣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는 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있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었다.

1981년 세종문화회관 소극장에서 제1회 박재희 무용발표회를 열었을 당시, 1부에서 승무와 태평무를 겨우 추고 2부는 창작 작품으로 이화여대 4학년 학생들을 출연시켰다. “제발 무대에서 쓰러지지 말고 끝까지 춤만 출 수 있게 해주세요” 기도를 하고 무대로 나가 간신히 춤을 추고 제자들에게 안기다시피 해서 무대 뒤로 돌아왔다.

박 교수는 청주대 교수가 된 이후인 1983년도에 심장수술을 했다. 갈비뼈 중간을 절단해서 뼈를 열고 하는 대수술이었다. 수술 이후 사뿐사뿐 춤을 추었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는 누구도 그를 심장에 기계를 넣은 환자로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그가 춤 인생 60년 공연을 앞두고 많이 아파서 제자들은 초긴장으로 공연준비를 했다.

첫 무대를 박재희의 태평무로 열고자 했으나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를 무대 위에서, 아니 공연장에서 볼 수 있기만을 바랐다. 김진미가 입춤 ‘강곡(江曲)_강의 노래’을 선보인데 이어, 손혜영의 산조춤 ‘바람이 숲 사이로’, 홍지영의 ‘가(可)... 닿다’, 그리고 마지막 박시종의 수묵화 같은 춤 ‘달빛 아래, 농(弄)’이 끝날 때까지도 박 교수의 안위가 염려됐다.

마침내 제자들의 춤이 끝나고, 출연자들이 무대 양 옆으로 물러나 다소곳이 길을 내고 앉은 사이를 뚫고 무대 정면에서 연보라 치마저고리를 화사하게 입은 주인공 박재희 명인이 나타났다. 행여 스승이 무대 위에서 쓰러질까봐 제자인 박시종 무용가가 스승의 춤사위를 거들며,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 안무한 무용인듯 티나지 않게 보조를 맞추며 무대 위를 한 바퀴 돌았다. 아름다웠다. 이어 제자들이 춤을 추며 나타나 충북의 무용을 전국수준으로 올려놓은 평생 춤꾼인 스승에게 차례대로 인사를 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래. 이것이 춤 인생 60년이구나. 비록 태평무를 보지는 못했지만, 이날 공연은 완벽했다. 공연 후 어둔 밤길을 달려오는 중, 박재희 교수가 다시 병원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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