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 . 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동양일보 조철호 회장이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김데니스 부회장으로부터 고려인협회기록서적을 받고 있다.
동양일보 조철호 회장이 카자흐스탄 고려인협회 김데니스 부회장으로부터 고려인협회기록서적을 받고 있다.

[동양일보] ‘2023 동양일보 해외 문화 탐사단’이 6박 7일 일정으로 4일 중앙아시아인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한 후 10일 귀국했다. 문화 탐사단의 이번 일정은 ‘민족 수난의 현장을 찾아서’라는 주제 아래 기획되었다. 이 같은 주제를 정한 이유는 1937년 9월부터 11월 말까지 스탈린에 의해 자행된 연해주 고려인 17만여 명의 중앙아시아로의 강제 이주 85년과 한반도 밖에서 가장 오래된 한글 신문인 ‘고려일보’ 창간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강제 이주와 ‘고려일보’ 방문에는 진천 출신으로 우리나라 근대문학과 디아스포라 문학의 선구자이며 독립운동가인 포석 조명희의 삶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터라 필자가 동행하게 되었다. 이러한 여정인 탓에 개인적으로도 ‘여행’이 아니라 공적인 ‘탐사’의 성격을 갖는다. 이는 필자를 포함해 일정에 참여하게 된 36명의 인원 대부분에게 해당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당초의 목적과 취지를 보고 자율적으로 선택한 결정인 까닭이다.

그러다 보니 출국하기 전부터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의 문화 유적과 역사 그리고 도시 문화를 체험한다는 가벼운 마음보다는 무거운 마음이 앞섰다. 업무의 연장이었고 포석의 삶을 비롯한 당시 우리 민족의 비극적 현장을 직접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 주는 비감이 교차한 게 원인일 것이다. 일정이 확정된 후 수년 전에 탐독했던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다시 펴들었다. ‘아리랑’ 전 12권 중 10권 속에는 당시 강제 이주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읽고 느낀 ‘못난 민족’의 비애와 슬픔이 오롯이 되살아났지만 어차피 그 현장을 체험해 볼 계획이었으므로 슬픈 비가(悲歌)를 다시금 환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85년이 지났음에도 역사의 화석이 되기를 거부한 채 살아 꿈틀대는 강제 이주 장면이 선명한 소설 한 권을 들고 비행기에 올랐다.

일정은 크게 4일 출국 후 카자흐스탄에 도착한 다음 3일째 되는 6일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우즈베키스탄으로 이동하는 여정인데 ‘고려일보’ 방문은 3일째 되는 6일에 이루어졌다. 동양일보 조철호 회장과 유영선 주필 등 관계자 6인이 참석해 ‘고려일보’와 ‘고려인협회’ 관계자들과 공식적인 환담이 이루어졌다. 우리말을 하지 못해 통역을 필요로 해야 하는 현실이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중앙아시아에서의 고려인들이 처한 현실적인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못내 아쉬웠다. ‘고려일보’의 전신인 ‘선봉’은 1923년 창간한 당시 해외의 첫 한글 신문이다. 포석은 1928년 연해주로 망명한 후 1929년 편집에 참여했고 1933년 문예면을 신설해 침체를 면치 못하던 고려인 사회의 본격 문학 시대를 열었다. ‘선봉’은 고국에서 온 유명 문사 포석을 고려인 사회의 정신적 지도자로 우뚝 서게 하는 결정적 매개 역할을 했다.

알마티에 있는 ‘고려일보’의 회의실에서 동양일보 방문단과 고려인협회임원, 고려일보 주필 등 관계자들이 면담을 하고 있다.
알마티에 있는 ‘고려일보’의 회의실에서 동양일보 방문단과 고려인협회임원, 고려일보 주필 등 관계자들이 면담을 하고 있다.

이후 ‘고려일보’는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당한 뒤 ‘레닌기치’로 1991년 소련 연방 해체 이후에는 ‘고려일보’로 제호가 바뀌면서 오늘까지 그 질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고려인 사회도 고국의 무관심과 현지 동화 정책이라는 큰 변화를 겪으면서 우리 말 사용이 급속히 줄어듦에 따라 신문도 순우리말에서 러시아어와 우리말로 병행해 사용하는 등 경제적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해 있는 상황이다. 일간지에서 주간지로 바뀐 것과 한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기자’가 없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고려일보’ 측에서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고국과 인적 교류를 적극적으로 희망하고 있어 이에 대한 실질적인 방안이 필요해 보였다. 타국에서 모국어와 모국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은 민족공동체의 구심적 역할을 하는 거점이며 현지 사회와 가교 역할을 하는 매우 중요한 동포들의 울타리다. 포석은 망명 후 ‘선봉’을 통해 고려인 사회에 지도자로서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앞에서 언급을 했는데 그 첫 번째 글이 바로 산문시 ‘짓밟힌 고려’다. 이 시는 당시 고려인 사회를 하나로 묶는 정신적 모태가 되었다. 둘 이상만 보이면 ‘짓밟힌 고려’를 일상적으로 낭송하며 일제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 독립의 의지를 돋우는 불쏘시개였다.

특히 식민지 현실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대의(大義)에 불을 지폈다. ‘짓밟힌 고려’는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된 후에도 소련 연방이 붕괴 전까지 지속적으로 고려인들을 하나로 묶는 민족시였다. 비록 통역을 통한 대화였지만 그들의 정신과 정서가 바로 한민족임을 실감한 시간이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엄연한 사실을 몸으로 체현한 귀한 경험이었다. 고려일보사 좁은 2층 복도에 “뿌리를 잊지 말자”는 편액은 지난한 환경의 제약 속에서 그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민족 정체성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어 가슴이 내내 먹먹했다.

또 그 옆에 걸려 있는 사진 앞에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강제 이주 초기 허허벌판에 버려진 고려인들이 남루한 옷차림을 하고 집단적으로 모여 물건을 파는 장면이었다. “뿌리를 잊지 말자”는 굳은 다짐은 저 남루한 옷차림으로 생면부지의 죽음의 땅에 부처(付處)되었던 조상들의 수난과 고난의 역사가 곧 그 뿌림임을 환기하는 일일 것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는 말은 결코 영광과 오만의 역사가 아님을 다시 되뇌며 다음 일정으로 발길을 옮겼다.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 . 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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