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동양일보]이번 탐사단의 일정은 모두 엄선해 선택한 특별한 여정이었지만 그중에서도 포석의 아내 황명희와 장녀 조선아의 묘를 참배한 일은 마치 포석의 묘를 참배하는 듯한 흥분을 갖게 했다. 원래 살았던 마을에서 들판 안쪽으로 더 들어가서야 비로소 묘를 찾을 수가 있었는데 탐사단을 태운 버스가 더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일행은 삼삼오로 걸어서 오랜만에 한국의 들녘을 걷는 기분으로 농로처럼 탁 트인 길을 걸어 들어갔다. 딱히 이정표라든가 안내 지도가 나와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묘를 찾는 어려움이 예상됐지만 다행히 유영선 주필이 구글(googie)을 실시간으로 잘 활용한 순발력과 한국에 있는 조선아의 외아들 김 안드레이와 통화를 한 덕분에 이국땅 초행길에서 낭패를 보는 일은 면할 수가 있었다.

조명희 장녀 조선아와 남편 김찌모페이의 묘비.
조명희 장녀 조선아와 남편 김찌모페이의 묘비.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평원을 바라보기만 했지, 이렇게 내려서 걷기는 처음이었다. 눈에 보이는 저 땅과 풀, 꽃과 물, 돌과 나무 등은 국경을 가리지 않고 한국의 들녘에서처럼 주변을 정겹게 감싸고 있었다. ‘대지(大地)’는 어디에서나 인종과 국가를 초월해 영원한 모성임을 실감한다. 그러나 이곳에 버려져 정착한 초기 이주자인 고려인 1세대들에게는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운 죽음의 땅이었을 것이다. 같은 자연환경이라고 해도 처한 상황이 주는 심리적 편차에 의해 풍경은 얼마든지 다르게 변색될 수 있음이다.

 

드디어 묘를 찾았다. 어렵지 않게 찾은 셈이다. 중앙아시아의 묘는 우리처럼 흙으로 봉분을 만드는 매장문화가 아니라 시멘트로 덮고 비석에 얼굴과 이름을 새기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묘는 관리되지 않아 날카로운 가시가 많은 아카시아나무가 버젓이 주인 행세를 하고 있어 참배객들의 접근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또 어떤 사람들인가. 연장도 없는 상황임에도 탐사단원들은 너도나도 솔선해 맨손과 막대기로 아카시아나무를 꺾고 잘라 주변을 깨끗이 정리했다. 한국 사람들의 순발력과 임기응변이 압권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장면이었다. 고려인 1세대인 우리 선조들의 이러한 피가 유전적으로 흐르고 있음일 것이다. “저렇게 기름지고 넓은 땅을 왜 놀리지!” 카자흐스탄의 드넓은 땅을 보며 차 안에서 일행 중 한 명이 한 얘기는 시사하는 바 크다.

답사단이 조선아 묘비앞에 포석조명희선집을 놓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답사단이 조선아 묘비앞에 포석조명희선집을 놓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묘 주변을 정리한 후 종손인 조철호 동양일보회장의 두 모녀와 가족사에 대한 배경 설명에 이어 개정판 포석전집을 묘소 앞에 놓고 일행은 숙연한 목례로 예의를 갖추었다. 부인 황명희는 연해주로 망명한 포석과 결혼해 3남매를 훌륭히 키우며 포석이 비극적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충실한 내조를 했다. 포석이 체포된 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했기 때문에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애끓는 부지하세월 속에서 3남매를 키운 것이다. 딸 조선아는 이름에서 보듯 포석이 조선식으로 이름을 지어준 첫 번째 핏줄이다. 포석이 체포될 때 여섯 살이었는데 아버지의 마지막을 정확히 기억할 정도로 총명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의 기록을 찾기 위해 관계 기관을 찾아 백방으로 수소문하는 등 부녀 관계를 떠나 포석 연구에 있어 괄목할 만한 자료 등을 발굴 포석 재평가의 기반을 마련한 인물이다. 참배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포석조명희문학기념실에 이어 포석의 모녀가 잠들어 있는 묘소에서도 특별한 시 낭송이 즉흥적으로 이루어져 탐사단원들의 심금을 울렸다. 오늘 하루는 두 모녀가 이역만리 고국에서 방문한 동포들 때문에 찾는 이 없던 쓸쓸함을 잠시 잊고 사후 가장 행복한 하루를 보내지 않았을까 싶다. 주변에 주로 고려인들의 묘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고려인 마을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 묘소 앞에서도 일행은 조용히 묵상에 잠겼다. 우리가 찾아온 목적이 꼭 포석의 두 모녀만을 위한 참배가 아님을 저 방치된 묘들은 말하고 있다.

타슈켄트시 외곽 공동묘지에 있는 조명희 부인 황명희(마리아)의 묘비.
타슈켄트시 외곽 공동묘지에 있는 조명희 부인 황명희(마리아)의 묘비.

 

다시 또 언제 올지 모르는 발길을 돌리며 일행은 버스에 올랐다. 우즈베키스탄의 평원에서는 유독 한국 사람들에게 익숙한 농작물이 눈에 자주 들어온다. 바로 ‘목화’다. 어마어마한 면적이 온통 목화밭이다. 지금은 한국의 들에서는 보기 힘들지만, 필자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에서 일상적으로 보던 풍경이다. 아마도 이주한 고려인들도 저 들녘에서 목화를 가꾸며 꽃을 땄으리라. 그들에게 목화꽃은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고된 노동을 상징하는 아픈 트라우마였을 것이다. “나그네가 바라보는 들은 목가적이요 낭만적이지만 그 속에는 농부들의 뼈마디 쑤시는 현실이 있다”는 구절을 새삼 떠올려본다.

사실은 한국식으로 한다면 참배하는데 술 한 잔 올리는 것이 예의며 기본인데 타국이다 보니 그러한 것들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던 것 같아 뭔가 좀 허전했다. 그러던 중 어디선가 ‘황성옛터’에 이어 ‘타향살이’가 구성진 가락을 타고 흘렸다. 필자의 룸메이트인 임각수 전 괴산 군수의 까랑까랑한 목소리였다. 순간 무릎을 쳤다. “그럼 그렇지, 한국 사람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망자를 위해 한 곡쯤 뽑아야 한국 사람의 신명답지.” 두 모녀의 묘를 뒤로 하고 일행을 태운 버스는 어느새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설원처럼 긴 목화밭을 옆에 끼고 질주하고 있었다. <끝>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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