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문학평론가 김기진… 생애와 예술(1903. 6. 29. ~ 1985. 5. 8)

체포 당시의 김기진 사진.
체포 당시의 김기진 사진.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 찾은 보물'

[동양일보]‘붉은 쥐’ 신경향파 소설의 효시

김기진이 가장 활발한 활동을 했던 시기는 1920~30년대로 근대문학 비평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시기였다. 1920년 <동아일보>에 ‘가련아’를 발표해 시인으로 등단하고, 1923년 <개벽>지에 ‘프로므나드 상티망탈’이라는 비평문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등단한 뒤, <백조>에 박영희와 함께 동인으로 참가했다. 그러나 일본 유학 중 경도된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경향파 문학에 심취했다.

김기진이 1920년대에 발표한 시에서 지식인의 적극적인 현실 참여나 민중과의 하나 됨을 주장한 작품이 많은 것도 이와 관련이 있다. 소설에서도 1924년 <개벽>에 ‘붉은 쥐’를 발표한 이후 ‘불이야! 불이야!’(1925), ‘젊은 이상주의자의 사(死)’(1925), ‘몰락’(1926) 등과 전문 삭제된 ‘Trick’(1925), ‘황원행(荒原行)’(동아일보, 1929), ‘심야의 태양’(동아일보, 1934) 등을 발표했는데 ‘붉은 쥐’는 신경향파 소설의 효시로 평가된다.

수유리 응접실에서 다시 최고회의 부의장인 박대통령과 팔봉(1962년경).
수유리 응접실에서 다시 최고회의 부의장인 박대통령과 팔봉(1962년경).

 

그는 특히 문단을 진단하는 평론을 많이 썼다. <개벽>에 발표한 ‘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1923)이후 ‘금일(今日)의 문학, 명일(明日)의 문학’ 등 한국비평문학의 문을 열었고, 1920~30년대 월평(月評)과 현장 비평을 활발히 전개해 문단의 흐름을 파악하고 전망한 평론을 발표했다.

6 · 25 이후에는 ‘통일천하’(1954~1955), ‘군웅’(1955~1956) 등의 역사 소설을 쓰기도 했으며, ‘나와 토월회 시대-신문화의 남상기(濫觴記)’, ’ 신극운동 초창기의 회고’ ‘한국신문 수난사’, ‘조각가 김복진’ ‘한국 현대문학의 재정리-회월 박영희의 카프문학과 회월의 인간’ 등 회고조의 글을 많이 발표했다. 1922년 연극연구단체 ‘토월회’를 창립하고, 1927년엔 영화연구모임 ‘찬영회(讚映會)’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는 등 문학 외에 연극 영화 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는 팔봉.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1950년)
구 국회의사당 앞에서 인민재판을 받는 팔봉. 앞에 검은 옷을 입은 사람(1950년)

 

형제가 포승줄에 묶여 일경에 끌려가

김기진은 일제강점 하의 혼란스럽던 시기, 파도처럼 밀려오던 사회현상을 외면하지 않고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질풍노도 같은 젊은 시절은 보냈다.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지도자적인 책임감으로 유학생활을 통해 배운 신문학이론을 한국에 도입했다. 그는 교육열이 높은 부모 밑에서 자주적이고 민주적으로 성장했으며 학교에서 만난 교수들이나 친구들과 이러한 관계가 유지됐다. 그러나 일제강점의 세상은 그리 만만치 않았다.

김팔봉 생가
김팔봉 생가

 

그는 일생동안 몇 번의 수형생활을 한다. 첫번째는 배재고보 시절 3.1운동에서 유인물을 만들어 돌리다가 체포돼 경찰서에서 3일간 구류생활을 한 것이고, 두번째는 1931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카프)1차 검거사건’때 종로경찰서에 검거돼, 자술서를 쓰고 10일 만에 석방된 일이다. 김기진의 구금은 집안의 큰 근심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장남인 김복진이 공산당청년운동 책임자 활동으로 1928년 8월 25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기 때문이다. 김기진의 가정은 어린 시절엔 유복한 편이었으나 성인이 되었을 때는 형편이 어려워져 그가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해야 했다. 김기진은 1924년 <매일신보>에 취직했다가 1925년 <시대일보>로 직장을 옮기고, 1926년 <조선지광>을 거쳐 <중외일보>로 옮긴다. 그러다가 1928년 형이 구속이 되자 신문사를 그만두고 처가가 있는 함경남도 이원에서 정어리 공장을 세우지만 실패한다. 그동안 그는 금광에도 뛰어들었고 명동에서 증권시장도 기웃거렸지만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았다. 김기진은 2년 만에 다시 <중외일보> 사회부장으로 입사했다가 <조선일보>로 옮겨 사회부장으로 근무했다.

딸 김복희 여사.
딸 김복희 여사.

 

“저의 집에 할머니가 네 분이나 계셨어요. 할아버지가 삼형제 중 막내셨는데, 첫째 둘째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혼자 되신 두 분 할머니를 아버지가 부양하셨어요. 친할아버지와 할머니, 서(庶)할머니까지 책임지셨으니 어깨가 무거웠을 겁니다. 저는 어릴 때 우리 집에 할머니가 왜 네 분인지 이해할 수 없었죠. 한 방에 10여 명이 함께 잤던 기억도 잊을 수 없고요.”

월간조선 ‘예가의 후손을 찾아서’(2017.5)에 실린 김기진의 딸 김복희의 인터뷰다.

도쿄 릿쿄대학
도쿄 릿쿄대학

 

1934년 2월 21일, 김복진이 5년8개월만에 만기출소로 나왔다. 김기진은 김복진과 함께 애지사(愛智社)를 창립하고 <청년조선> 창간호를 발행했으나, 12월 ‘카프 제2차 검거사건’(전주 사건 또는 신건설사(新建設社)사건. 신건설은 사회주의 성향의 극단 이름임)으로 이기영, 한설야, 송영 등 23명이 체포되는 가운데 김복진과 함께 다시 체포된다.

“두 분을 굴비처럼 포승줄에 묶어 끌고 갈 때 대문 밖에서 할머니께 나란히 큰절을 하셨죠. 일경이 어머니(강명희)를 구둣발로 짓밟기까지 했어요.” 7살이었던 김복희의 눈에 비쳤던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김기진과 김복진은 전주경찰부에서 조사를 받고 70여 일 동안 구금되었다가 35년 2월에 풀려난다. 카프는 ‘카프 2차사건’을 겪으면서 급격히 조직이 와해됐다.

 

배재고보
배재고보

 

일제 회유에 넘어가 친일활동

김기진은 1935년 5월 경기도 경찰국에 카프 해산계를 제출했다. 김기진은 1938년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회부장으로 취직, 1940년까지 근무한다.

김기진의 친일은 1935년 카프 탈퇴 후 약 3년간의 은둔기를 거쳐 1938년 무렵부터 소극적으로 나타나기 시작됐다. 김기진은 192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비판한 문인이었다. 일본 유학에서 보고 배운 사회주의 지식을 바탕으로 식민 조선의 피지배상황을 냉철히 인식할 수 있었던 선구적 예술인이었다. 그러던 그가 친일로 돌아서게 된 데는 연이은 구속생활과 기울어진 가정경제 등 정신적인 압박도 있었겠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의 일제의 압력과 회유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40년부터 김기진의 글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세계대전의 참전을 미화하는 적극적인 모습으로 발전했다. 그해 9월 20일부터 28일까지 ‘매일신보’에 게재된 수필 ‘미나미 총독 수행기’가 그의 친일 문필활동의 개시였다. 이 글은 매일신보의 기자로서 조선총독의 지방시찰을 수행하면서 쓴 취재기였다.

김기진은 자신의 이름을 김촌팔봉(金村八峯)로 개명한뒤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의 결성준비위원이 되었다. 그리고 1942년부터 1943년까지 ‘역사적 명령’,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나도 가겠습니다’ 등의 친일작품을 <매일신보>에 발표했다. 1944년에는 문인보국회 상무이사로 취임하여 이광수와 함께 상하이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했다.

김기진은 훗날 집필한 ‘나의 회고록’에서 일제 말기의 친일 행각에 대해 ‘독립을 위한 비밀 공작을 했다’는 변명을 했다. 일본 관헌의 도움과 협조를 역이용해 단시일에 100만원(지금의 100억)을 독립자금으로 조성하려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춘원과 함께 중국 상하이로 가 일본 돈으로 100만원을 구하셨어요. 요즘 돈으로 몇억 원일 겁니다. 먼저 20만원을 국내로 송금했지만 나머지 돈을 운반하려다 일본 헌병대에 잡히고 마셨어요. 평양으로 압송되셨는데 출옥 후 한 달쯤 지나 해방이 됐어요. 아버지가 평양에서 해방을 맞았다면 남쪽으로 오기 힘들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운명이었나 봐요.”-김복희 증언.



해방후 형 김복진과 애지사 재설립

1945년 해방이 되자, 김기진은 형과 함께 설립했다가 실패한 출판사 애지사를 재설립하여 인쇄, 출판업에 종사했다. 애지사는 한때 직원 수가 100명이 넘을 정도로 운영이 잘 됐으나 6·25 때 화재로 소실돼 문을 닫았다. 김기진은 6·25 전쟁 당시 서울에 남았다가 7월2일 서울에 입성한 인민군에 의해 체포돼 ‘인민재판’에 회부, ‘좌익활동의 변절자’, ‘일제 경찰의 밀정’ 등의 죄목으로 서울 세종로 부민관(옛 국회의사당) 앞에서 즉결처분을 받는다. 그러나 닷새 뒤에 기적적으로 살아났고, 이 기억을 재구성해 1951년 ‘나는 살아있다’라는 글로 썼다.

1951년 5월 대구로 피난, 육군종군작가단에 입대해 작가단 부단장으로 활약하며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1953년까지 주로 ‘전선문학’에 관한 글을 썼다. 그후 수필류와 문단관계 회고류의 글, 역사소설류를 썼다.

1958년 민권옹호투쟁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했으며 이승만의 자유당 독재를 비판했다. 1960년 경향신문 주필을 거쳐, 1966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회장, 1967년 소아마비특수아동보육협회장, 1969년 재건국민운동중앙회 고문 등을 비롯하여 한국펜클럽·한국문화협회 고문, 세계복지연맹한국본부 이사 등을 역임한다. 가족으로 도쿄 유학시절 성악을 공부하던 강명희(姜明希·1983년 작고)와 만나 장남 인한(1988년 작고. 동아일보 기자), 장녀 복희(작고. 도미), 차남 승한(1987년 작고. 육군장교), 삼남 용한(도미)을 낳았다. 장녀 복희는 애국지사 백남훈의 아들 백선기와 결혼했다.

김기진은 1985년 5월 8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수유동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연보



1903. 충북 청원군 남이면 팔봉리 출생(6.29)

5세부터 서당에서 한문을 배움

1910 황간공립보통학교 입학

1912 영동공립보통학교 전학

1916 배재고등보통학교 입학

1921 일본릿 쿄(立敎)대학 영문학부 입학

1922 토월회 조직

1923. 일본 릿쿄(立敎)대학 영문학부 중퇴, 김복진과 파스큘라(PASKULA)결성

평론집<클라르테 운동의 세계화>발간. 수필 ‘프로므나드 상티망탈’발표

1924 소설 <붉은 쥐>, 평론 <금일의 문학, 명일의 문학> 발표

1925 카프(KAPF)를 결성하면서 사회주의 문학운동을 본격화함

1926. 조선지광 기자. 중외일보 기자

1926 박영희와 유명한 ‘내용-형식 논쟁’ 시작.

1927. 마르크스주의 ‘형식관’에 대한 비평적 논문을 집중적으로 쓰기 시작

1929 임화와 ‘대중화 논쟁’을 벌임

‘변증적 사실주의’, ‘대중소설론’, ‘예술운동에 대하여’ 등 평론발표

1931. 카프(KAPF)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

1934. '애지사' 창립. <청년조선. 창간호>

장편소설을 동아일보에 연재

1935 카프(KAPF) 해산계 제출. 동 사건으로 전북도경찰서에 구금

1936. 소설집 <청년김옥균>(한성도서)출간

1938. 소설집<해조음> (박문서관) 출간. 친일단체인 시국대응전선사상 보국연맹결성 준비위원

1944.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겸 평론수필부 회장

1945 출판 인쇄업 《애지사》 재설립 운영

1950 7월 인민재판에서 극적으로 살아남

1951. 육군종군작가단 부단장

1952. 소설집 <심야의 태양>(한성도서) 출간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음

1953. 소설집 <최후의 심판>(영문사)출간

1954. 수필집 <심두잡(영문사)) 출간, 소설집 <청년김옥균>(한성도서)발간

1956. 소설집 <통일천하>(남양문화사)출간

1957 1월부터 6월까지《사상계》 연재

1958. <김팔봉 수필집>(경기문화사)

1960. 경향신문 주필(60~62년)

1961. 재건국민운동중앙회 회장

1965. 소설집 <통일천하>발간.

1978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1984. 소설집 <초한지>(어문각)출간

1985. 지병으로 사망(5.8)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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