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송보영 수필가

[동양일보]메마른 붓이 스치듯 넘나든다. 노옹(老翁)의 손에 들려진 가슬가슬한 붓끝이 먹물 한 모금으로 갈 한 목을 축이고 무채색 종이 위를 휘도는가 싶더니 메마르고 성근 수풀들이 일렁인다. 옹이가 듬성듬성 박힌 휘어진 고목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앙상한 잔가지 끝에 떠나기 싫어 머뭇대는 마른 잎들이 드문드문 매달린다. 학 두 마리가 가을 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려는지 목을 길게 빼고 하늘을 본다. 조락의 계절 스산한 동산에 있는 초옥 한 채 가년스러운데 달빛 처연한 방 안에 앉아 글을 읽는 이 그는 누구이며 무채색의 종이 위에 춤을 추듯 갈필을 휘날리며 가을 소리를 불어넣은 이 그는 누구인가.

둥근 창을 통해 비치는 달빛을 벗하며 글을 읽던 연로한 시인(중국 송나라 문인 구양수)은 바람 소리 비바람이 몰려와 쇠붙이에 부딪히는 소리, 전쟁터에서 사람과 말이 달려가는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아 동자에게 나가서 살펴보라 한다. 동자는 ‘별과 달이 밝을 뿐, 인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라고 대답한다.

무미건조한 동자의 말을 들은 노(老)시인은 “아 슬프도다. 이것은 추성秋聲(가을소리)이다 어찌하여 오는 것인가. 가을 모습이란 그 빛깔은 참담하여 연기가 흩날리고 그 모습은 맑으며 깨끗하다. 하늘은 높고 햇살은 맑으며 그 기운은 차가워 사람의 살갗을 파고들고, 그 뜻은 쓸쓸하여 산천이 고요하다.

인생의 저문 시간에 서 있는 시인 구양수가 가을과 맞닥뜨린 소회를 표현한 글 한 편이 조선 풍속화의 3대 장인 중 한 사람인 단원 김홍도의 가슴에 녹아들어 그의 섬세한 붓끝을 통해 김홍도필추성부도, 시의도(詩意圖)가 탄생 되었다.

여름의 막바지 어느 수집가의 초대전에서 마주한 산수화 한점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내게로 와 발길을 붙잡는다. 화폭 속에서 시인이 전하고자 했던 노년의 비애와 죽음을 앞둔 단원의 심회가 절절하게 다가온다. 이건 생의 막바지를 견뎌내는 이들의 회한과 겸허함 아쉬움이 뒤섞인 부르짖음 아닌가.

화폭을 직시한다. 휘어지고 구부러졌을지언정 쓰러지지 않고 버텨내는 나목 들에 닿는다. 성근 수풀, 메마른 가지, 구불구불한 고목들이 토해내는 곡진한 소리를 듣는다. 왠지 그 부르짖음이 고통의 소리를 넘어 처연하지만 아름다운 소리로 환치되어 들림은 어떤 연유일까. 좀 구불거린들 옹이가 있은들 어떠하랴. 구불거리며 자란 나무의 무늬는 물결을 이루며 아름다운 무늬가 되는 것을. 처연하면서도 아름답다.

나는 지금 추성의 때를 지나 삭풍의 중심에 서 있다. 생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수많은 계절이 내 안을 훑고 지나갔다. 내게 허락된 사계 중 심고 가꾸고 열매를 맺는 뜨거웠던 날들은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더러는 알곡을 거둘 때도 있었고 쭉정이가 많을 때도 있었다. ,삶의 뒷면을 보면 소낙비와 우레를 견뎌내느라 상처로 얼룩진 곳도 많다. 이런 나를 어찌할 것인가.

가을의 초입 산책길 하천 변 벚나무에 느닷없이 벚꽃이 피었다. 어쩌자고 때도 모르고 피었는가. 너무 안쓰러워 지나치지 못하고 바라보며 주절거린다. 너를 집으로 데리고 갈 수도 없고 어찌하면 좋으냐고. 내 안에서도 시도 때도 없이 자잘한 욕망이 꿈틀댄다. 참 물색없다. 저 꽃과 나는 참 많이 닮았다. 그도 나도 안쓰럽다. 그럼에도 그 물색 없음을 사랑한다. 구부러지고 휜 고목에서 그 너머의 아름다운 무늬를 보려 하는 마음의 근원일 터라서다. 그것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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