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

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

[동양일보] 괴산군 쌍곡구곡 떡바위, “북두칠성성혈”에 담은 세번 째 의미다. 첫째, 경남 함안읍 도항리 수직의 바위 표면에 은하수 북두칠성등을 새겼다. 그 은하수 중앙쯤 반원곡선 안에 세로로 4~5개 선을 새겼다. 배와 돛대로 본다. 다음은 국민대 장명수교수의 해석이다. “배에 영혼을 실어 저승으로 보낸다. 죽음에 대해 어떻게 극복해야하는가 깊은 고민을 했다.” 지금도 사람이 불행하게 일찍 죽게 될 경우, “하늘나라 별이 되겠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한 공포의 해결 방안으로, 죽어서 영생하고 싶은 염원을 별나라로 귀착시켰다.1980년 러시아 여가수 ‘알라 푸카체바’의 「백만송이 장미」는 애모한 여인에게 헌신한 화가의 사연을 노래했다한다. 심수봉이 창의해서 불렀다. “그립고 아름다운 내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둘째, 청동기인들의 위와 같은 의식은 지금 장례풍속에 남아있다. 시신을 누여놓는 나무판이 칠성판이다. 여기에 북두칠성의 모양으로 7개의 구멍을 뚫거나 먹으로 표시했다. 이런 장례풍속은 한민족만의 독특한 풍습으로 세계 다른 민족에서는 볼 수 없다. 이것은 북두칠성을 영혼의 고향이라 여겼기 때문에 그리로 돌아가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라 한다.
셋째,북두칠성을 믿는 칠성신앙(七星信仰)은 옛부터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고유신앙이다. 우리의 할머니와 어머니들은 장독대에 정안수를 떠놓고 칠성님에게 소원을 빌었다.북두칠성신이 사람의 생로병사, 부귀영화, 불로장생, 화복길흉을 주관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넷째, 칠성신이 무신(巫神)으로 계승됐다. 《삼국유사》 권1 「기이」 1, 신라 김유신(595∼673)의 탄생일화, “칠요(七曜)의 정기를 타고나서 등에 칠성의 무늬가 있고, 또 신이한 일이 많았다”.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칠성판에 구멍을 뚫는 이유는 ‘죽음을 관장하는 북두신에게 빌어 죽음을 구제받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다섯째, 결혼식 때 먼저 지내는 초례(醮禮), 임금들의 초재(醮齋)도, 칠성님께 올리는 인사와 기원이었단다. 다음은 북두칠성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인물들이다. 김유신은 등에 칠성무늬, 강감찬장군은 칠성과 문곡성, 정몽주는 어깨 위 7개의 검은 점, 안중근은 배와 가슴에 칠성반점 7개, 즉 북두칠성이 응했다하여 응칠(應七)이라고도 불렀다.
다섯째, 단명의 운을 태고난 아이의 경우 북두칠성에 빌면 장수한다고 믿었다. 지금껏 서술한 내용은, 공인된 학설, 통용되는 상식, 인터넷에 올라있는 학술논저 백과사전등의 정보를 참고요약했다. 참고한 자료의 출처를 일일이 밝히지 못한 점을 용서하기 바란다.
여섯째, 괴산군 쌍곡구곡 떡바위 윗면에 파놓은, “북두칠성 성혈(性穴)”도 청동기인들의 위와 같은 의식까지 담아서 파놓았다고 봐야한다.
일곱 째, 떡바위 암반 위에 파놓은 “북두칠성 성혈(性穴)”은 그 크기와 깊이가 다르다. 실제 북두칠성의 크기와 밝기를 반영하여 파놓은 것이리라.
​ 여덟 째, 충북에 있는 문화유산은 뺏기지 말고 충북인이 연구하자. 1989년 최초의 육아일기 이문건의 《양아록》을 발견연구하여, 1996년 한국한문학연구 제19집에 소개했다. 1997년,2009년 KBS 1TV에 출연 설명했다. 이문건종손집은 잘 알려지지 않아 그의 저술을 보러오는 사람이 드물었다. 《양아록》공개 후에도 다른 최초창의적 작품을 연구하느라, 좀 나중에 그 종손 이재인집에 다시 찾아갔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위촉을 받은 괴산지역담당 김모(金某)사료조사위원이 몇년전 《묵재일기》등을 제보하여, 영인하기 위해 빌려갔다 한다. 아, 한발 늦었구나하고 탄식했다.1997년 봄 이복규교수가 이문건이 쓴 《묵재일기》 안쪽면에 필사돼있던 《설공찬이》가 현존 최초의 한글표기소설이라 언론방송과 학계에 소개했다. 천추의 한이다. 이런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최초기록을 중시하여, 최초발견소개 홍익학문하려니 항상 노심초사다. 천명이라 자위한다. “최초창의가 선진이며, 최초선점이 불멸의 명예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