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숙영 수필가

김숙영 수필가

[동양일보] 홍시 한입 가득 베어 문다. 달콤하고 사르르 녹는 맛을 어찌 글로 표현하랴. 탁구를 같이하는 언니가 감 고을 영동에서 홍시를 따왔다고 연락을 주셨다. 언니 곁님이 종이상자에 가득 담은 작은 홍시를 주시며 본인이 직접 따셨다고 하신다. 홍시를 보는 순간, 감사한 마음으로 어두웠던 마음마저 밝아진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돈다.

으깨질까 조심조심 꺼내어 다섯 개를 먹었다.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홍시다. 황혼기가 되니 깊은 맛이 덤으로 온다. 높은 감나무에 고운 감이 옹기종기 매달려있는 모습이 특별하다. 푸른 하늘 속 보석처럼 박혀있는 모습도 그려본다. 찬 서리 맞으며 떫은 맛 녹여내고 달콤한 감이 되어 나에게 왔으리라.

‘홍시 다루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무척 조심스럽게 다루며, 일을 성사한다는 뜻으로 풀어보련다.‘홍시 먹다 이 빠진다.’라는 말을 친정어머님께 여러 번 들었다. 하찮은 일을 하다가도 화를 당한다며 매사를 ‘홍시 다루듯’ 하라고 말씀하신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무조건 목표를 향해 달리던 내가 아닌가. 자연의 흐름을 천천히 살피며 순리에 맞게 살아야 한다. 감나무를 보라. 맑은 날만 있었을까. 숱한 고비를 넘기며 아름다운 감이 달렸으리라. 홍시가 되기까지 무위자연의 모습으로 묵언수행 하며 기다렸을 터이다.

세월을 가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감나무가 크는 걸 본 사람은 없는데 나무는 자란다. 감나무는 녹색 잎이 단풍 들며 욕심 없이 다 떨어뜨리고, 붉은 감만 대롱대롱 달린다. 이 또한 우리가 가는 삶이 아닐까. 홍시가 되기까지 노년의 아름다움이 내 삶이라 상상하며 달떠본다.

어릴 적 초등 저학년 시절 추억을 꺼내본다. 감이 좋아 시골 외갓집 광에 갇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졌었다. 집안일을 하는 행랑채 머슴 부인이 작은 채반에 홍시 몇 알을 담아 주었다. “더 먹고 싶으면 광에 많으니 달라고 하세요.” 하는 말에 살며시 광으로 들어갔다. 장독을 열어보니 뾰주리감이 홍시가 되어 볏짚과 함께 가득 들어 있었다. 감을 꺼내어 게 눈 감추듯 먹고 있을 때였다. 증조부가 광 있는 곳을 지나시며, 광문이 열렸다고 빗장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저녁이 되며 컴컴해지니 무서워 눈물이 나왔다. 그 때 외사촌 동생이 누나를 찾고 있었다. 이때다 싶어 내 존재를 알리자, 동생이 빗장을 열어 주었다.

‘세상의 온갖 것에 대해 가지려는 생각을 버린다면, 항상 마음이 편안하며 마침내 근심이 없어진다.’는 화엄경 법문을 살펴본다. 욕심이 어리석은 일을 만들고 있다. 홍시로 광에 갇혔던 일 또한 교훈으로 남아 있지 않은가.

홍시의 맛을 즐기며 조상의 넉넉한 마음을 배울 작정이다. 홍시는 때가 되면 달콤하게 익어 떨어진다. 홍시처럼 하심(下心)의 마음으로 근심 걱정 내려놓으면 어떨까. 내가 가는 길, ‘홍시 다루듯’ 스스럽게 정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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