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 화가 윤형근… 생애와 예술(1928. 4. 12. ~ 2007. 12. 28.)

 
 
어린시절 형제들과.
어린시절 형제들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다음세대를 위한 기록유산 프로젝트 '다시 찾은 보물'

 

[동양일보]울분과 독기를 작품에 쏟아내다

그는 화가 났다. 세상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다. 모두 세 번의 복역과 한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긴 윤형근은 그동안의 분노와 울분, 독기를 작품에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만 45세 때의 일이었다.

1973년, 그의 작품에서는 화사한 밝은 색채가 사라지고 ‘검은’ 작품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초창기 그의 그림에서 선보였던 풍부한 감수성을 담은 밝은 색채와 무지개빛 색띠는 사라지고 서러움과 울분을 표현한 ‘속이 타들어 갈 때’의 색인 ‘청다색(靑茶色)’이 등장했다.

이때 그려진 그의 작품들은 훗날 그의 대표작이 된다. 수묵화의 농담에서 물감이 번지는 느낌을 두 개의 기둥으로 표현한 단색화가 바로 그것이다. 하늘을 상징하는 ‘파란색’과 땅을 상징하는 ‘암갈색’을 혼합한 색인 ‘청다색’을 큰 붓으로 내려그으면 그 기둥 사이로 문처럼 환한 빛이 보이는데 그는 이 문을 ‘천지문(天地門)’이라고 이름 지었다. 천지문은 오래된 한국 전통 가옥이나 고목, 흙을 연상시키는 묵빛과 여백이 대조를 이루며 마치 심연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작업실에서.
작업실에서.

 

윤형근의 색은 단 두 가지다. 울트라마린이란 깊고 푸른 ‘블루(Blue)’와 마치 종이를 태운 듯한 진한 암갈색 ‘엄버(umber)’. 암갈색의 엄버(umber)는 흙색을 닮았을 뿐 아니라 실제로 토양에서 유래한 물감 이름이다. 그는 두 가지색을 섞어 푸른 기운을 머금은 검정에 가까운 색채를 탄생시켜 사용하였고 거기에 오일을 섞어 면포나 마포 위에 내려 그었다.

“흙 빛깔은 자연이 썩어서 정화된 빛깔인가? 나는 언제부터인가 흙빛깔이 좋아졌는지 잘 기억은 안 난다. 또 나무빛깔도 그렇다. 또 돌의 빛깔도 그렇다. 자연경치의 빛깔도 겨울의 자연빛깔이 좋다. 이 모두가 인조가 아닌 자연의 빛깔이, 그중에서도 죽은 자연의 빛깔이 좋다. 퇴색한 것 같은 탈색한 것은 같은 그런 빛깔 말이다......그래서 나는 내 그림도 그런 느낌을 표현하려고 애쓴다. 서구의 캔버스를 싫어하는 이유의 하나도 그 싱싱한 마포에 페인트 같은 것(아연화)으로 고유의 재질을 덮어 버린 것이 싫다.”

-윤형근의 기록(1977)

 

김환기가 보낸 엽서.
김환기가 보낸 엽서.

 

추사글씨에 뿌리, 호방한 붓질

그는 서구식 캔버스를 쓰지 않았다. 대신 코팅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천 위에 그림을 그렸다. 처음에는 면포를 이용했다가 나중에는 주로 거칠고 투박한 느낌의 마포를 사용했다. 그러면 물감의 번짐이 마치 화선지에 먹이 은은하게 번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면지와 마지를 화포(畫布)로 쓰고 있다. 그 재질감이나 자연적인 색감에 호감이 가서이다. 언제 보아도 이것들의 포근하고 따뜻한 소박미는 물키지가 않는다. 종이도 그렇다. 양지(洋紙)보다 손으로 만든 한지에 정이 간다. 이 모두가 자연스러움-즉 소박한 데서 오는 것 같다.”

물감도 안료에 직접 제작한 기름을 섞어 자체적으로 만들었다. 즐겨 사용하던 파란색에 무거운 암갈색을 조금씩 섞으면 명도와 채도가 낮은 색의 혼합은 완전히 검지는 않은 검은색에 다다랐다. 강하면서도 아련하게 남는 색이었다. 그는 이것을 ‘먹빛’이라고 묘사했다. 그런 다음 큰 붓에 물감을 묻히고 푹 찍어 내려 화면을 완성했다.

윤형근은 평소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사랑했다. 어릴 적부터 배인 집안의 분위기 영향 때문이었을까, 윤형근은 추사 글씨 2점을 애장하고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은 추사의 글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였다. 서예가들이 획을 긋듯, 그는 호방한 붓질을 통해 안료가 천에 스며들고 배어 나오기를 반복한다.

미국 국적의 한국인 문화 미술비평가인 홍가이 박사는 “윤형근은 동양적 전통재료인 닥종이(한지) 위에 먹을 갈아서 서예용 붓으로 획을 그어 작품을 만드는 대신, 서구의 현대적 재료를 사용하여, 서예라는 예술행위에서 추구하는 독특한 예술세계를 펼치고 있다”며 “이것은 수묵과 서예의 예술행위를 고스란히 캔버스로 옮겨와 이행하는 것으로 가히 전통서예/수묵화의 혁명적 쇄신을 예고했다 할 만 하다. 이런 기술적인 혁신 하나만으로도 윤형근은 한국 예술사에 남을 역사적인 공헌을 했다”고 말했다.

 

서교동 작업실 앞에서 가족과 함께.
서교동 작업실 앞에서 가족과 함께.

 

반공법 처벌후 그림에 ‘색’ 사라져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꼽히는 김환기와 윤형근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윤형근은 김환기의 제자이자 사위였다. 나이 차이는 15세 밖에 나지 않지만, 그는 김환기를 ‘아버지’라 불렀고, 김환기의 부인인 김향안을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

윤형근과 김영숙은 김환기가 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듬해인 1960년 결혼을 했다. 김환기는 귀국 후 다시 홍익대학교 교수가 되어,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내지만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를 다녀온 뒤엔 1964년 아예 미국으로 이주한다. 뉴욕에서 자리를 잡은 후 김환기의 그림은 확연히 달라졌다. 달, 여인, 항아리, 매화, 사슴 등의 한국적 소재를 단순화시켜 서정적 반추상 양식으로 표현하던 반추상화에서 화면 전체를 점으로 찍은 추상화로 변신한 것이다.

1970년 한국일보사에서 주최한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김환기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출품하여 대상을 받는다. 시인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을 차용한 이 작품은 캔버스에 유채. 세로 236㎝, 가로 172㎝의 대작이었다. 그리고 전면이 푸른빛 점화였다. 점화의 작업방식은 화면 전체에 점을 찍고 그 점 하나 하나를 여러 차례 둘러싸 가는 동안에 색이 중첩되고 번져나가도록 하는 방식으로 전체 화면을 메꾸어가는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리면서 김환기는 “서울을 생각하며, 오만가지 생각하며 찍어가는 점”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찍은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라고 일기에 썼다.

김환기의 그림의 변신은 한국의 미술계를 놀라게 했지만, 윤형근에게도 신선한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윤형근이 먹의 깊은 빛깔과 번짐 효과를 유화물감과 캔버스를 통해 구현하기 위해 도전한 것은 이때부터였다는 게 작가의 고백이다. 수묵화인 양 연하게 번져나가는 ‘한지실험’ 효과는 김환기의 제안이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김환기와 윤형근은 자주 편지를 주고 받았다. 편지를 통한 끈끈한 가족애는 윤형근의 그림의 발전에도 큰 도움이 되었다.

윤형근이 ‘반공법’이라는 억지죄로 한달동안 서대문형무소를 다녀온 뒤 ‘다사롭고 고운 색’을 버리고 ‘칙칙하고 어두운 색’으로 붓질을 하면서 마음의 독기를 풀고 있을 때 장인이 노출혈로 쓰러졌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살자면 별 병도 생기나 보다. 한 3년 견뎌왔는데 결국은 병원에 들어와서 나흘째 된다. 휴양하는 것도 같고 고문을 당하는 것도 같고 창밖으로 하늘과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도 아무 생각이 안 난다. … 병원의 식사는 훌륭해서 좋다. 걱정들 말라. 수화”(1974년 7월 10일).

청주상고시절.
청주상고시절.

 

이 엽서를 띄운 지 보름 후인 7월25일 김환기는 세상을 떴다. 윤형근은 61세의 나이로 이국에서 눈을 감은 장인에 대해 “너무나 불쌍하고 뭔지 모르게 한없이 원통해서’ 밤새도록 통곡을 했다”(뿌리깊은나무, 1980년 6,7월 통합호)고 회고했다. 그리고 그 해 10월 윤형근은 자신의 신촌 아틀리에에서 오른편엔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걸고 그 옆엔 자신의 신작을 놓고 사진을 찍었다. 두 그림 사이에 서서 왼손은 바지주머니에 찌르고, 오른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사진은 김환기로부터 출발한 자신의 예술세계에 대한 결별과 새로운 출발에 대한 다짐으로 보여진다.

윤형근은 김환기가 죽은 지 5개월 뒤인 1975년 1월 미국으로 날아가 뉴욕주 발할라 산마루의 켄시코(Kensico) 묘지를 찾아가 참배하고 장인의 흔적과 유품을 정리했다. 이때 남긴 윤형근의 기록은 김환기에 대한 그리움으로 절절하다.

“망망한 하늘을 나르니 서울이 까마득하다. 아버지 안 계신 미국을 가다니 이 무슨 팔자인가”(1975.1.8.)

“아침에 내린 비는 개이고 아버지 안 계신 텅 빈 화실에 어머니는 늙으셨고 한참 흐느끼다 밤늦게까지 어머니와 지난 날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다”(1975.1.9.)

“종일 또 어머니와 이야기하다. 아버지는 볼 수 없고 아버지의 예술만 보니 허망하다.”(1975.1.11.)

“아버지 산소에 가다. 넓은 산야에 불러 봐도 아버지는 아무 대답이 없다.”(1975.1.12.)

“어머니는 아버지가 불쌍해서 자꾸만 생각이 나서 하시는 것을 옆에서 보기가 딱하다. 아버지 참고록을 잃어버리기 전에 주신다고 미리 주시다. 아버지 짧은 생애에 많은 일을 하시다가 가셨다는 것을 새삼 생각되는 밤이다. 나도 열심히 일해야지.”(1975.2.4.)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