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김종대 연세대 통일연구원 객원교수

[동양일보]간신으로 알려진 신숙주는 일본은 시찰한 <해동제국기>를 저술한 당대의 학자이기도 했다. 그가 죽을 때가 되자 성종 임금이 찾아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이에 신숙주는 “일본과 절대(失和)하지 마시라”고 했다. 항해술이 무섭게 발전한 일본과 반드시 화친을 유지하여 수시로 그 의도를 파악하고 능력을 점검하라는 뜻이었다. 이에 성종은 주기적으로 사신을 일본에 보내다가 귀찮았는지 중단해 버렸다. 서해 류성룡이 <징비록> 첫머리에서 “신숙주의 경고를 잊어버려 임진년의 왜란을 당했다”고 탄식했다. 손자가 병법에서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白戰不殆)’라고 한 뜻도 여기에 있다. 그까짓 일본이 무에 그리 대단하겠느냐는 조선의 오만이 불러온 재앙이었다. 반면 일본은 정유재란 이후 류성룡의 징비록을 탐독했다. 정조 임금 때 일본에 간 사신이 일본판 징비록이 서적상마다 일본 지식인들에게 베스트 셀러로 팔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크게 놀랐다. 임진왜란 이후 3백 년 만인 1894년의 청일전쟁이 당시 조선에 진출한 일본군과 정치인들은 정작 조선에서는 잊혀져 존재조차 모르게 된 징비록에 대해 거의 다 알고 있었다. 징비록은 노론과 소론의 당파 싸움의 프레임으로 재단된 일종의 금서였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주변국의 지식인들이 다 알고 있는 걸 우리만 모르고 있지 않느냐는 점이다.

이 점은 박지원이 청나라를 여행하고 쓴 열하일기를 통해서도 성찰된다. 박지원은 이 여행기를 통해 만주족의 청나라라고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조선의 선비들을 개탄했다. 청나라에서 본 새로운 문물과 지식을 배우려고 하지 않고 내부에 자신의 주관에 갇혀버린 선비들을 질책하는 지식인의 분노가 느껴진다. 비슷한 일은 신라의 삼국 통일을 직후에 당대의 문화강국인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천재들에게도 같은 심정이 느껴진다. 유불선이 중흥한 당나라에 유학 온 신라의 천재들은 그리스와 로마까지 연결된 국제 대도시에서 새로운 문명의 스케일을 체험했다. 당시 장안에 신라촌이 생겼는데, 지금도 이름이 확인된 유학생만 645명이 남아 있다. 당대의 문장가인 최치원이나 중국 선종의 최고 권위에 오른 의상 대사 등 신라의 지식인들은 한낱 영남의 부족국가였던 신라가 이제는 제국을 건설해야 할 새로운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이들이 당나라의 만류도 뿌리치고 신라로 귀국해보니 아직도 진골, 성골 따지면서 부족국가 시대의 고루한 사고에 머무른 귀족들 판이었다. 새로운 통치이념을 만들고자 했으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 신라는 통일 후 30년 만에 망했다.

지금 대한민국은 주변을 살피면서 새로운 스케일 21세기 문명국가를 구상해야 한다. 1987년의 규칙과 관습에 얽매이다 보니 아직도 여야 당파 싸움이 그칠 줄 모른다. 그 당시 4천만 국민의 대한민국은 작은 나라였다. 그러나 이제는 5천2백만에다가 전 세계에 7백만 동포가 진출해 있다. 1987년의 앙시앙 레짐을 고수하며 새로운 공화국을 재건하지 못하는 고루한 정치인들은 미래 세대에게는 짐이 될 뿐이지 자산이 아니다. 지금 정치권의 언어를 보면 정치의 논리가 아니라 정파, 또는 당파의 논리다. 새로운 국가를 열망하던 신라의 지식인의 눈에 비쳐지는 진골, 성골 이야기들이다. 거대한 전환이 착수된 바깥세상이 돌아가는 사정에 무지하고 단지 표가 되는 곳을 찾아다니는 포퓰리즘 정치에서 서민과 지방은 죽어난다. 여당이 얼마나 할 일이 없으면 경기도 김포를 서울로 편입하는 발상으로 선거를 하려는 건가.

나라는 커졌는데 스케일은 여전히 작은 사람에게 정치를 맡겨서는 안 될 일이다. 간디의 묘비명처럼 철학이 없는 정치는 죄악일 뿐이다. 마치 노동 없는 부를 추구하는 것과 비슷한 죄악이다. 여야의 총선기획단이 발족하는 모양인데, 이제는 당파가 아닌 정치의 논리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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