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문학평론가)

이석우 시인(문학평론가)

[동양일보]은행잎이 노랗게 쏟아져 있는 보도를 걸었다. 하루의 피로가 뒤로 밀리며 옛 기억이 삐죽 고개를 내민다. 사치스럽지 않은 고독 하나 정도는 거느리고 가을을 꼭 넘기자 했건만 무엇에 쫓기듯 이렇게 하루를 버리고 마는가 싶어 가슴이 아릿하다. 오후의 바람이 코스모스를 살며시 흔들자, 잠자리가 투명한 날개를 파르르 쳐올리며 맴을 선다.

오늘은 기어코 무엇이든 하나쯤 되돌리자, 작정하고 김 사장과 술 한잔하기로 하였다. 깜짝 싶은 것은, 집에 들어간 지 오래되지 않은 시간인데 그가 머리 손질을 말끔하게 하고 나타난 것이다. 아마 그의 칼칼한 성격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 칼칼함에는 자기 존재감을 절대 구부리지 않는 속성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술을 몇 순배 돌리다. 선생님으로 화제가 쏠렸다. 한 교사의 일탈 내용이 방송을 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 시국이 가닥을 잡아가는 듯한데, 초를 치는 그자의 인격은 무엇인가. 요즘 선생님들은 참으로 탁한 생각이 앞선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딱한 선생님으로 끝날 일인가. 딱한 선생님이 가르친 아이들이 나중에는 이 나라를 감당해야 할 텐데…. 정말 딱한 노릇이다.

김 사장이 옛날 국어 선생님 이야기를 꺼냈다. 동석한 국어 선생님이 출신이 있어서 국어 선생님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었다. 그는 너무나 국어 선생님이 미웠었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를 몰고 다니며 거들먹거리던 그가 차분하게 책을 읽고 국어과제를 감당했을 리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에 대한 누적된 경고가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드디어 국어 선생님께 궁둥이를 들이대게 되었는데 이게 웬일인가. 30대가 넘어서고 있는데도 그 강도가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참지 못한 김 사장은 몽둥이를 제지하며 “어쩌라고 이렇게 팹니까?” 벌떡 일어서서 교실을 뛰쳐나오고 말았단다. 그 무서운 국어 선생님의 폭력에 항거하며 대적할 수 있었던 그 빛나는 용기! 그는 순간, 눈을 반짝이며 바라보고 있는 친구들에 의해,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친구들과 어울려 무용담을 실컷 늘어놓다가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들어오는 길에 맞은 자리에 자꾸만 늘어 붙는 속옷은 그에게 국어 선생님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불타오르게 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아버지께 피가 터진 맞을 자리를 보여주며 국어 선생님의 부당성을 강하게 주장하였단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아버님께서 밖으로 슬그머니 나가시더니 삽자루를 꼽아 들고 방을 들어서는 게 아닌가. 아니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그 평소에 연마한 운동 실력을 총동원하여 날렵하게 삽자루 세례를 피할 수 있었다.

둑방길을 걸으며 휘파람을 불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몇 가지 말을 안 듣긴 했지만 그렇게 맞아야 하는 일이던가. 그리고 더 믿을 수 없는 아버지의 무모해 보이는 선생님 행위에 대한 무한한 신뢰는 무엇이란 말인가.

풀벌레 소리에 젖은 들녘을 달빛이 거의 지나쳐 갔을 무렵, 그는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새벽이 멀지 않은 것 같은데 술에 취한 아버지의 노랫소리가 들리고 있던 것이었다. 걸어오시는 방향이 선생님 하숙집 쪽이 분명하였다. 아침이 되어서야 안 일이지만 아버지와 선생님께서 밤늦도록 술을 마셨다는 것이었다.

무슨 말씀을 나눈 것일까? 국어 선생님은 아버지께 죄송하다고 사과는 하신 것일까. 그렇다면 아버지 말씀은 분명 “웬 말씀인교, 죽지 않을 만큼 막 패십쇼.”라고 했을 터이다.

그런데, 말을 맺고 있는 김 사장의 눈가에 촉촉한 이슬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미움이 가져다준 그리움 때문이리라. 술 한잔 더 들이키고는 그래도 그 미움 때문에 이만큼 산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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