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 소설가

강병철 소설가

[동양일보]사춘기가 시작되던 열세 살 겨울,

이모와 고모까지 합친 아낙네 넷이서 오그르르 몰려오며 치마꼬리를 여민다. 박첨지네 조카딸 순임이의 진학 결심을 꺾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먹잇감 포위하듯 일단 빙 둘러싸긴 했으나 목소리가 문풍지 흔들리듯 덜덜 떨리는 표정이다.

"니가 ……상급반 핵교에 들어가면……아래 동생덜 공부를 뭇허게 됭께.”

외가 핏줄이나 친가 피붙이 모두 마음이 약한지라 살얼음판 걷듯 눈치 보다가.

“가뜩 흔들리는 느이 집안 말아먹는 게 자칫 거시기허닝께……."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한참을 더듬더듬 머뭇대는데 그중에서 나이가 가장 많은 큰고모가 먼저 용기를 내어.

“동생덜 생각헤서. 이. 중핵굘 포기하구 양초공장에 일 나가라. 막내 순철이가 다섯 돌 지났는디 걔만큼은 상급핵교꺼정 갈쳐야 될 거 아니냐?”

그러니까 졸업하자마자 취직을 해서 살림 밑천으로 늦둥이 사내아이 순철이 학비를 준비하라는 얘기이다. 언제부터였나, 밥상 모서리만 만지작거리던 작은 이모도 힘을 얻었는지 엉덩이 걸음으로 방바닥을 옮겨.

“취직헤서 동생덜……갈치다가 낭중에 돈 모아서 시집가는 게……최고여.”

그 순간 찬 바람이 몰아치면서 우물거리던 소리조차 가물가물 흐릿한데.

“니 위루 순자나 순모까지 모두 초등 졸업장 따자마자……돈 벌러 식모살이 떠났잖니? 집안 살림이나 도와주며 입도 덜어주능 게 여자 팔자여.”

그런데 그 착한 순임이도 이번만큼은 아주 냉정하게.

“싫은디유.”

쌍동 잘라버렸다. 먼저 말을 열기 시작한 큰고모만 연신.

“돈암동 당구장 집에 취직하먼 밥은 멕여주구, 두어 달에 한 번씩 창경원 구경두 헐 수 있당. 나머진 꼬박꼬박 월급 모으먼 시집갈 밑천두 챙겨진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작은고모도.

“아들은 집안 대를 이어야 허닝께, 학벌이 필요헝 거구. 딸은 그냥 살림 밑천으로 집안 청소나 바느질 배우구 사능 게 세상 이치여.”

그 순간 순임이가 다시 말을 홱 낚아채며.

“싫다구유.”

눈물까지 글썽이며 내지르자 고모들의 표정이 하얗게 굳어지는데. “저는요. 공불 헐 거유. 미래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시는 말씀인디유.”

“공부 ……무슨? 우리넨 내 목구녕 풀칠이나 허먼 되능 거여.”

“저는 이모나 고모처럼 사능 건 사양합니다. 앞으룬 시대두 바뀌닝께 고등핵굔 나와야구유. 나는 얼굴두 그렇구 눈도 작아서 백화점 취직은 불리헤유. 고등핵교만 졸업허면 시험 쳐서 공무원으루 취직했다가 모은 돈으루 교대엘 들어가 국민핵교 선생님 되능 게 목표유. 제 인생 책임질 것두 아니잖뉴?”

중년의 시골 아낙네들도 쓸쓸한 표정으로 물러서서 미닫이를 연다. 문설주에서 엿듣던 아버지 박첨지의 화들짝 놀라는 어깨 너머로 눈발이 새하얗게 쏟아지는 중이다. 1972년 ‘10월유신’의 그 시대, 소녀는 그렇게 중학생이 되기 위해 싸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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