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

이상주 전 중원대 교수

[동양일보] 이번엔 괴산군 칠성면 쌍곡구곡 떡바위 선돌 서쪽면에 새겨놓은 ‘독(항아리, 돈주머니, 보물항아리,농협휘장)모양’의 암각화에 대해 설명한다. 크기는 가로 40cm 높이 49.5cm이다.

첫째, 떡바위[병암(餠岩)]에는 동쪽과 서쪽으로 거대한 바위 2개가 있다. 서쪽 바위는 제단이다. 윗면에 ‘북두칠성 성혈(性穴)’을 파놓았다. 두 바위사이에 표면이 매끈한 자연석을 끼워 세웠다. 선돌[입석(立石)]이다. 이 선돌 서쪽면에 독(항아리)모양의 암각화를 새겨놓았다. 보물항아리와 북두칠성 성혈을 한 군데 새겨놓은 곳은, 이곳이 한국 유일 최초다. 즉 창의융합의 현장이다. 이 암각화와 성혈을 인터넷에 올린 사람이 없다. 산수수청(山秀水淸)하여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그 문화재적 중요성을 간파한 사람이 없었나보다. 2002년 필자가 발견했으니 21년이 됐다. 고도의 관찰감식력이 최초창의에서 앞서간다. 2004년 4월 11일 일요일 충북문화유산답사회 한수현회원과 최초로 탁본했다. 2013년 3월 23일 토요일 중원대학교 한국학과와 종교문화학과 개학연수 때 답사했다.

둘째,‘독(항아리)’모양의 암각화는 그 모양으로 보아 무엇을 담는 그릇을 새긴 것이 분명하다. 오늘날 농협의 ‘상징휘장(象徵徽章)으로 사용하고 있는 ‘복주머니(돈주머니)’모양과 매우 비슷하다. 칠성일대에 살던 청동기인들이 북두칠성 성혈을 새긴 암반 제단에 제물을 바치고, “독”가득 먹거리를 가득 채워달라고 기원했다. 이 염원은 면면히 이어져, 지금의 ‘농협휘장(복주머니모양)’으로 계승형상화됐다. 동일사유(同一思惟)가 반복전승된 현장이자 증거다.

셋째,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한 ‘농경문청동기’에, 땅을 가는 쟁기모양의 농기구를 든 남자를 새겼다. 또 여자가 독(항아리)모양의 그릇에 무엇을 담는 모습을 새겼다. 땅에서 작물을 심어 곡식 열매가 나오는 것이 신비로웠다. 마치 어머니가 애기를 낳는 것과 동일하게 여겼다. 그래서 지모신(地母神)의 있다고 믿고 곡식이 풍성하기를 기원했다. 그리고 지모신을 모시는 지모신앙(地母信仰)을 갖게 됐다. 이 농경문 청동기는 풍요와 다출산의 염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제의행사를 한 증거물이다.

넷째, 쌍곡에 살던 부족들은 청동기에 새기는 것보다 돌에 새기는 것이 더 쉬워 떡바위 선돌 표면에 ‘독(항아리)모양’의 암각화로 그들의 염원을 새겨놓고 천지신명이 알아주기를 바랬다. 서로 재질이 다를 뿐, 그들의 사유세계와 염원을 영구히 존속시키기 위해 새겼다는 사실은 같다. 그래서 ‘북두칠성 성혈’과 함께 독(항아리)모양’의 암각화는 지금 남아있다. 기록은 인류사의 말없는 증언이다. 한 장의 ‘음성통문(陰城通文)’도 그 일례이다.

다섯째, 왜 독(항아리)모양의 암각화를 그려놓고, 북두칠성 성혈을 파놓았을까? 북두칠성은 국을 뜨는 도구인 ‘국자’별로도 불렀다. 독(항아리)과 국자(북두칠성)는, 청동기인들에게도 식생활에 긴요한 도구다. 먹거리가 풍성해 항아리에 가득 담을 수 있기를 기원했다. 또 먹거리를 국자로 떠서 먹듯이, 떠서 먹을 음식이 넉넉하기를 기원했다. 그들은 그 염원을 바위에 사실적으로 새겨, 신이 그것을 내려다보고, 보답을 내려주기를 기대했다. “지성감천이다” 즉 독(항아리)에 먹거리를 가득 채우게 해주기를 칠성님과 천지신명에게 빌고 제사지내는 제단(祭壇)이다. 위의 성혈과 독모양의 암각화를 통해, 칠성과 쌍곡일대에 살던 청동기인의 주술종교신앙과 농업발달변천사를 유추할 수 있다.

여섯 째, 2019년 10월 15일 중원대학교에서 연민학회 주최, 독서당고전교육원후원으로 ‘동아시아 구곡문화국제학술대회’를 마친 후, 쌍곡구곡을 거쳐 선유구곡등을 안내답사했다. 그때 이 독(항아리)모양 암각화도 소개했다.경남 진주에 사는 안수중회원이 답사과정을 촬영 요약 편집하여 ‘유튜브’에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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