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영 시인

하재영 시인

[동양일보]청주 청원구 정하리 가을은 그야말로 황금빛입니다. 오후 햇살을 받으며 정북동토성에 들어서자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나도 아내와 동편 소나무와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정북동토성에는 소나무가 몇 그루 있습니다. 내가 바라보는 동편 소나무 한 그루는 인기 ‘짱’입니다. 토성을 찾은 대부분 사람들은 그 나무를 배경으로 영상물을 만듭니다.

영상물을 만드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봅니다. 혼자 온 사람, 연인과 온 사람, 가족과 온 사람……. 촬영 포즈도 다양합니다. 손을 머리 위로 올려 하트 모양을 하는 것은 상투적입니다. 연인들은 과감하게 입맞춤하기도 하고, 몇 사람이 글자 형태를 만드는데 그 모양이 영어로 ‘LOVE’를 나타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특히 관심을 끈 장면은 소나무 옆에서 젊은 남녀가 춤추는 모습이었습니다. 손을 잡기도 하고, 떨어졌다가 몸을 밀착시키기도 하면서 그간 익힌 춤동작을 예쁘게 펼쳤습니다. 토성과 소나무와 하늘을 배경으로 춤추는 율동이 마치 무대 공연을 보는 느낌을 들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사진과 동영상을 찍는 동안 11월 태양은 하늘처마 서편에 달려 있습니다. 그때서야 동쪽 소나무 주변에 주었던 눈길을 서쪽으로 돌립니다.

서산 위 낮은 하늘에는 또 다른 볼거리가 펼쳐져 있습니다.

석양입니다. 곱고 아름답습니다. 붉디붉은 노을입니다.

문장의 마침표 같은 모습으로 태양은 산 너머로 빠지며 하루를 마감할 것입니다. 그 시각 일터에 머물던 사람들은 퇴근을 준비할 것입니다. 몇 년 전까지 직장에 근무하며 퇴근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일하는 즐거움도 좋지만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가는 일이 왜 그렇게 설렜는지 지금 생각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종종 퇴근하며 바라보는 저녁노을은 발길을 멈추게 했습니다. 아련한 그런 풍경은 지금도 맘을 저리게 합니다.

아내도 노을을 바라봅니다. 잔주름이 부쩍 는 아내입니다. 노을을 보며 아내는 어떤 생각을 하는지 궁금하지만 묻지 않습니다. 40여 년 함께 살며 그냥 통하는 무언(無言)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내는 큰 수술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모습으로 가족들을 대합니다. 자식을 둔 엄마로서, 남편의 아내로서, 할머니로서 견뎌야 할 인고의 시간이 몹시 힘들 것입니다. 어쩌지 못하고 맘만 아픕니다.

사람들이 찾는 정북동토성도 세월의 흐름 안에 곳곳이 훼손되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자연재해로 없어질 뻔 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시간의 층계에 생긴 상처를 다독이며 무너진 부분도 새 흙으로 채웠기에 지금 같이 푸른 모습으로 있는 것일 겁니다.

태양은 이내 서산 밑으로 빠졌습니다. 태양이 쓴 붉은 노을을 시로 읽어봅니다.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몸을 휘감습니다. 곧 어둠도 내리고, 별도 뜰 것입니다. 가만히 두 손을 모아봅니다. 내일 새벽 태양은 다시 아침노을을 만들며 하늘에 빛날 것입니다. 그게 희망이라 우리 삶은 가슴 벅찬 일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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