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아닌 만남, 죽음의 인문학 콘서트-
김시덕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교수

김시덕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교수
김시덕 을지대 장례지도학과 교수

지난 5년, 코로나19라는 지구적 대재난은 인류의 최첨단 소통 기술의 시험대였다. 바로 비대면 온라인 소통이 그것이다. 온라인 회의, 수업, 콘서트 등 인간과 인간이 만나야 하는 곳곳에 온라인이라는 기술이 소통의 숨통을 열어줬다.

그러나, 이 기술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져야 하는 인문학적 감성을 온라인이라는 삭막한 소통으로 바꿨다. 그에 따라 2019년 이후 전 지구에 걸쳐 가장 인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문학적 감성은 초토화돼 버렸다. 425년 전 임진왜란이 막을 내릴 즈음 조선은 문명은 물론 인문학적 감성 역시 초토화됐다. 오늘, 이순신의 예장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영웅, 성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순신은 지금까지 칼을 든 무장으로서 서남해안 해전에서 연전연승을 기록한 장군으로서 이미지만 부각하느라 그의 죽음이 어떻게 처리되었는지는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심지어 이순신의 유해가 어떤 경로로 아산에 이르렀는지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그리운 사람 이순신이 온다’라는 표어의 ‘이순신 예장 행렬’은 바로 삭막해진 우리의 인문학적 감성을 넘어 인간 이순신을 조명하자는 기획이다. 그런데, 왜 죽음이냐고? 이순신의 죽음을 처리한 곳이 아산이고, 가장 큰 현충 시설인 현충사가 있는 곳이 아산이기에 여기서 이순신의 죽음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죽음은 살을 애는 듯한 아픔이 있는 사별, 이별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어느 때부턴가 우리식 사고가 아닌 서구식 사고로 죽음을 생각해 왔다. 우리의 죽음은 사별, 이별이 아닌 새로운 만남의 희망이다. 죽음을 처리하는 의례는 새로운 만남을 기원하는 기도이자 축제이다.

구조화된 유교식 상례에서도 죽음은 그냥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이 탄생하는 존재이다. 유교식 상례에서 삼년상을 치르는 과정은 돌아가신 고인을 조상신으로 승화시키는 대서사시이다. 삼 년을 거치면서 고인은 조상신으로 재탄생하고, 인간의 수명보다 더 긴 4대(약 120년)까지 사당에서 좌정하여 살아 있는 자식, 손자 가족과 함께 생활한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가족으로 120년을 후손과 함께 생활한다.

이뿐인가, 서남해안 지역의 진도다시래기나 밤다래, 추자도의 산다위는 죽음을 이별이 아닌 새로운 만남이라고 직설적으로 표현한다. 이들 놀이는 장례가 고인을 애도하는 슬픔의 울음바다가 아니라 새로운 만남의 희망을 노래하는 잔치이다. 출상 전날 민속극으로 펼치는 진도다시래기에서 중이 봉사 마누라와 수작해서 아이를 낳는 장면이나, 밤다래의 춤판 속에서 벌어지는 은근한 성적 신체접촉 등은 바로 새로운 탄생을 상징한다.

추자도의 산다위를 보자. 무덤이 완성될 즈음, 장례를 치르던 여성들이 가장 건장한 남성을 점찍어 집단으로 노골적인 성적 표현을 서슴지 않는다. 고인을 보냈지만, 새로운 탄생, 만남을 기원하는 기도가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인류학자 전경수는 이를 ‘의례적 윤간’이라 했듯이 죽음을 보내고, 새로운 희망에 차오르는 상징이다.

엄격한 유교식 상례를 치르면서도 새로운 희망은 놓지 않았다. 바로 대떨이, 대돋움이라는 전국적 장례 놀이를 벌여 슬픔으로 일그러진 상주의 얼굴을 웃음기 띈 얼굴로 바꾸어 놓는다. 행상 전에 상두꾼들이 발을 맞춰본다는 핑계로 마을에서 가장 연세 높은 어른을 상여에 태우고 마을을 한 바퀴 돈다. 겉으로는 어른의 장수를 기원한다는 건 핑계이고, 다음 차례라는 메시지를 바탕으로 새로운 만남의 기원이 아니겠는가.

어른 집은 물론 이웃에서는 당연히 푸짐한 술과 안주를 내놓아 마을이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최소 3일간의 잔치판이 된다. 장례 때 춤추고 노래했다는 전통은 이미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우리의 문화이다. 이런 점에서 장례는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하는 마을 잔치이자 새로운 만남의 희망을 키우는 축제가 아니겠는가.

이 시점에서 400여 년이 넘은 이순신의 예장을 기획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저출산, 인구절벽 걱정이 이제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현실이 되었다. 임진왜란 직후 어수선한 상황에서 제대로 치르지 못했던 이순신 장군의 장례를 오늘에 되살려 보자는 문화관광 진흥 정책도 중요하지만, 이순신의 예장을 통해 새로운 만남의 희망이라는 축제를 열어보자는 것이다.

이순신의 예장은 1614년, 순국 후 15년이 지난 시점에 산소를 이장하면서 이루어졌다. 예장을 했다는 한 줄의 기록밖에 없는 그때 상황을 재현(再現)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다행히 1627년 원종예장도감의궤와 1645년 소현세자예장도감의궤가 남아 있어 17세기의 예장이 어땠는지 근거를 삼을 수 있었다.

‘그리운 사람 이순신이 온다’라는 예법의 전통을 바탕 삼아 오늘날의 상상력으로 재연(再演)한 이순신의 예장 행렬이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이순신 예장행렬은 코로나-19로 무너졌던 우리의 인문학적 감성을 일깨우고, 인구절벽 등 희망을 꺾는 뉴스가 난무하는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만남의 희망을 키우는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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