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형은 중원미술가협회장

문형은 중원미술가협회장
문형은 중원미술가협회장

[동양일보]‘95개조 반박문’ 게재 소식을 들은 로마 교회는 루터에게 겁을 줄 목적으로 사제들을 파견했다.

하지만 그들을 당황하게 한 별종은 거짓말을 하거나 없는 말을 지어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루터를 굴복시키려고 파견된 가톨릭 신학자들은 난상토론에서 제대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번번이 깨졌다.

그들은 상대방의 허점을 구체적으로 파고들기보다는 루터의 주장이 과거 파문당한 자들의 논리를 답습한 것이라는 얕은 수술만 남발했다.

성적매매를 반대하다 사형당한 후스(Jam Hus), 라틴어 성서를 영어로 옮기는 큰 업적을 세웠지만, 이단 선고를 받은 위클리프(John Wycliffe) 같은 사례가 반대자들이 제기하는 비교 대상이었다.

루터는 공포감과 인신공격으로 가득 찬 적들의 말에 놀라지 않고 꾸준히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써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Karl V)가 나서 루터를 겁박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오늘날 보름스 국회라고 부르는 회의였다.

황제는 루터가 보는 앞에서 “너의 논리를 포기하지 않으면 제국에서 생존권을 박탈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오늘날 독일과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폴란드를 광범위하게 포함하고 있었다.

시민으로서 반드시 보장돼야 할 안전 권리를 박탈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루터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외쳤다.

“성서와 이성에 입각한 진리를 바탕으로 내 주장이 틀렸다고 입증되지 않으면 절대 철회할 수 없다”고 말이다.

또 덧붙여 “내 양심은 오직 신께 사로잡혀 있다”고 주장했다.

양심의 자유가 선언되는 순간, 진정한 근대적 지성의 씨앗이 싹트고 있었다.

물론 루터는 담대함을 유지한 결과 독일 전체에서 도망자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정치적 지지자와 후원자를 얻을 수 있었다.

작센 선제후를 비롯해 황제와 대립 관계에 있었던 독일 영주들이 루터의 편에 섰고, 그들은 자신의 지역을 가톨릭교회가 아닌 루터교를 믿는 지역으로 바꿨다.

여기에는 어떤 마케팅이나 외교도 작동하지 않았다.

어리석을 만큼 일관성이 사람들을 강화한 것이다.

루터가 작센의 한 성에 틀어박혀서 수년간 작업했던 ‘독일어 성서’는 기존 권력에 대한 저항을 새 흐름으로 만들어 내는 촉발제가 됐다.

그전까지만 해도 성서는 라틴어로 돼 있어 일반 대중이 읽고 이해하기 힘들었다.

교회의 미사 강론이나 사제의 해석을 통해서나 성서의 내용을 들을 수 있었다.

루터는 사람들이 자신의 믿음으로 구원받는 세상을 만들려면 저마다 쉽게 읽고 기억할 수 있는 텍스트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특히 지적훈련을 거치지 않은 서민들이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는 지역어 성서를 절실하게 여겼다.

각고의 노력 끝에 발표된 독일어 성서는 기독교 교리의 확산뿐만 아니라 문맹 퇴치와 문화 발전에도 크게 이바지했다.

갑질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고, 저항하고 거부하면 당할 불이익을 두려워할 뿐이다.

하지만 전면에 나서는 인물이 없으면 변화는 절대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중에는 갑의 논리를 스스로 내면화해 요구받는 것 이상으로 충성하는 굴종이 대물림된다.

누군가에게 항의해야 할 때 제대로 용기가 나지 않는다면 루터의 일생을 들여다보는 것도 꽤 좋은 동기부여가 될 것이다.

새로운 조류로 만들어 낸 루터의 일관성으로 성공을 이룰 수 있듯, 필자가 거주하는 충주시와 문화예술 분야 진흥을 위해 애쓰는 충주중원문화재단은 문화예술의 다양성 있는 프로그램으로 콘텐츠를 개발할 의무가 있다.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공립미술관 설립 타당성 사전평가를 통과한 시립미술관이 건립될 경우 지역 예술과 생태자원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변화하는 전시공간 흐름을 반영한 열린 공간으로 충북 북부권역과 중원문화예술의 새로운 중심 역할을 할 것이다.

예술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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