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우리 사회에서 ‘윤리’라는 말은 별로 인기가 없다. 가끔씩 어떤 사람을 비난하기 위해 ‘그 사람은 비윤리적이다.’라고 평가하거나, 세상 물정 모르고 시대에 뒤떨어진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고 도덕군자 같다고 평가하는 정도에서 사용될 뿐이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윤리라는 말이 사용되는 경우가 획기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공공 기관의 각종 윤리위원회는 말할 것도 없고, 대기업들도 사회적으로 비난받는 일을 저지르고 나면 사회적 공헌을 하겠다며 윤리를 들먹인다.

무속과도 통하는 풍류(風流)에서 출발해서 불교와 유교, 도교를 받아들여 우리 나름의 틀을 형성한 전통문화는 21세기 초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일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그 중요한 징표 중 하나가 학교에서 도덕 교과를 독립시켜 가르치고 있는 일이다. 윤리나 철학을 고등학교 수준에서 독립적으로 가르치는 나라가 꽤 있지만, 우리처럼 초등학교에서 고등학교까지 일관되게 독립된 도덕 교과를 유지하는 나라는 중국과 일본, 싱가포르 등 이른바 유교문화권에 속하는 국가들이다.

도덕 교과가 학교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 말이다. 모든 국민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겠다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교육조서’가 발표된 이후로 정작 전통학교에서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던 도덕 교과는 사라질 위험이 있다는 곤혹스러움과 마주해야 했다. 그 위험에 최소한으로라도 맞서기 위해 독립시킨 과목이 바로 ‘수신(修身)’이었고, 이 과목이 20세기 지난한 역사를 거치면서 살아남아 현재의 도덕 교과를 이루는 다양한 과목명으로 우리 앞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학교에서 ‘윤리’와 마주치는 일이 많다 보니 아무래도 윤리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었다는 평가도 있는 반면에, 오히려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의지와 실천력은 약화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이런 평가들은 각각 이렇게라도 살 수 있는 것이 학교 윤리교육 덕분이라는 생각과, 우리 사회에는 유독 입으로만 도덕과 정의를 외치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어느 쪽이든 가능성이 있지만, 총체적인 평가는 치밀한 경험 연구 등을 거쳐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이 지점에서 확인하고 넘어갈 일이 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윤리(倫理)가 무엇일까’라는 물음이다. 외형적으로 시민사회가 정착해서 시민이 누릴 수 있는 자유와 권리, 경제적 여유가 이전에 비해 획기적으로 증대되었음에도, 우리들 삶이 그리 많이 나아진 것 같지는 않다는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렇게 된 데는 부의 불평등한 분배와 비교에 근거한 상대적 열등감 확산 등이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겠지만, 최소한의 예의도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의 지속적인 증가도 중요한 몫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호감 정치인들이 주도하는 양대 정당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다르면 친구 사이에도 대화를 이어가기 어려울 정도가 된 정치 상황 악화가 이런 경향을 부추기고 있다.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사람을 뜻하는 팬(fan)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이른바 팬덤 정치가, 옳고 그름에 관한 평가를 제치면서 동의하지 않는 상대방을 무조건적으로 미워하고 배제하는 행태를 불러오고 있다. 대화를 제대로 하려면 내가 만나는 그 사람에게 먼저 말할 기회를 주어야 하고, 의견이 다를 때는 최선을 다해 합의에 이르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을 하버마스(J. Habermas)라는 독일 철학자는 ‘의사소통 윤리’라는 말로 표현하면서 현대 사회에서 꼭 필요한 윤리라고 강조했다.

누군가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화가 치미는 순간이 온다면, 먼저 의사소통 윤리를 떠올릴 필요가 있다. 나의 의견과 다른 의견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자 권리이기도 하다. 다만 우리는 그 의견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나은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그 경우에도 먼저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존중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한다. 다가오는 총선 관련 이야기가 쏟아지기 시작하는 시절에, ‘의사소통 윤리’도 꼭 함께 생각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는 섣달 하늘이 청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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