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포석조명희문학관 문학박사

강찬모 포석조명희문학관 문학박사

[동양일보]가을이 깊어 간다. 늘 푸를 것 같은 포석공원의 느티나무와 단풍나무도 잎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가지로 황홀한 겨울 왕국을 준비하고 있다. 포석조명희문학관은 포석공원을 전경으로 한 주변 경관이 뛰어나 문학관 2층 테라스와 문학창작실에서 바라보는 포석공원의 풍경이 아름답다. 필자는 이곳에 근무하게 되면서부터 문학관의 4계의 변화를 시시로 보고 느끼는 행복한 호사를 누리고 있다. 특히 4계 중 요즘처럼 겨울로 가는 가을 마차(馬車)의 야경이 주는 정취가 여러 상념을 불러일으킨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는 표지석 주위로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는 그 자체로 한 폭의 쏴한 ‘묵화(墨畫)’다. 게다가 맨발을 하고 두 팔 벌려 세상을 품고 있는 포석 동상의 뒷모습에 살포시 내려앉은 달빛은 그야말로 추야장(秋夜長)의 ‘라스트 댄스(Last Dance)’처럼 처연하도록 탐미적이다. 이런 날은 멀리 있는 그리운 사람의 따뜻한 체온과 살가운 친구의 다정한 목소리가 잠자는 현(絃)을 아스라이 깨운다.

포석에게는 평생 두 명의 진정한 친구 요즘 말로 하면 ‘절친(切親)’이 있었다. 한 사람은 극작가 수산 김우진이며 또 한 사람은 소설가 민촌 이기영(1895~1984)이다. 김우진과의 우정은 이미 다룬 바 있고 내친김에 이기영과의 우정을 소환함으로써 각박한 시대에 한국 근대문학의 일획을 그은 최초의 근대적 인간들이 수놓았던 삶의 내음을 새롭게 향수하고자 한다. 포석과 민촌이 처음 만난 것은 1923년 2월 동경 유학생들의 모임인 아나키즘 단체였던 ‘흑우회’에서였다. 김흥식은 ‘작가 이기영’이란 책에서 “주지하다시피 이기영은 자신의 등단(1924)이후 조명희가 소련 망명(1928)이전까지 그야말로 동고동락하며 간담상조하는 사이였”고 “1924년 시대일보 기자였던 조명희를 통해 문단의 인사들과 접촉면을 늘렸으며 조명희의 주선으로 1925년 여름 ‘조선지광’의 편집기자로 취직함으로써 최소한의 생활 안정을 얻게 되었다.”고 밝혔다. 조명희의 장녀인 종숙 씨의 증언에 의하면 이기영은 조명희의 집에 함께 기거했다고 한다. 실제로 이기영이 ‘조선문학’에 기고한 ‘조명희 동지를 추억함’이란 글에서도 “내가 포석과 같이 서울에서 셋방 살림을 한 후부터는 하루도 그와 떨어지지 않았으며 한집에서 살기를 두 번이나 하다가 서로 방세가 밀리어 집 주인에게 쫓겨나곤 하였다.”고 술회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기영이 고향인 천안에 잠깐 내려와 있을 때 포석이 목천에 사는 매씨 댁에 가기 위해 이기영에게 동행을 요청한 후 만나 일을 보고 서울행 차 시간이 너무 늦어 목천에서 성환까지 40여 리의 밤길을 걷는 장면은 영화의 한 컷처럼 몽환적이며 낭만적이다. 지친 발걸음과 허기진 배를 달래며 그들은 삶과 문학 그리고 암담한 시대의 현실에 대하여 회의 혹은 체념하거나 때론 분노하면서 그렇게 봄 밤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포석과 이기영의 인간적 관계는 ‘조선문학’에 기고한 이기영의 육성으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친교를 맺은 후에도 서울에서 함께 지내기는 그가 소련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불과 3~4년이었으나 우리들의 동지적 우정은 매우 길었다.” 두 사람의 특별한 관계는 1928년 6월 5일 포석의 소설집 ‘낙동강’과 이기영의 소설집 ‘민촌’ 공동 출판기념회를 함께 열 정도로 각별했다. 이후 포석은 망명(1928. 8.21.)을 하고 이기영은 남아 카프의 대표적인 작가로 활동하다 월북(1946)했다. 이기영은 다른 월북 작가들의 불행한 최후와는 다르게 생을 마감할 때까지 북한의 대표적인 작가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다. 특히 대하소설 ‘두만강’(1954~1961)은 그를 북한의 독보적인 작가로 만든 소설로 노벨문학상 후보에까지 오르게 한 작품이기도하다.

이렇게 두 사람은 헤어져 다시는 살아서 만나지 못했다. 다만 포석의 제자며 북한에서 문화선전성 제1부상을 지낸 정상진이 쓴 ‘아무르만에서 부르는 백조의 노래’ 책을 보면 연해주 출신인 정상진을 보고 이기영이 가장 먼저 물었던 것은 포석의 생사였다. 이때 이기영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귀중한 사실을 말한다. 28년 포석이 망명하기 전날 자신의 집에서 내일 망명한다는 말과 함께 팥죽을 안주삼아 밤을 새워 통음을 했다는 것이다. 삶이 통째로 전환되는 ‘망명’이라는 절체절명의 날을 앞두고 그들은 그렇게 까만 밤을 하얗게 지새웠던 것이다. 한 사람은 망극하고 애절한 ‘배웅’으로 또 한 사람은 언제 다시 돌아올지 기약 못하는 고국에서의 마지막 밤을 ‘작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흘러 수산도 가도 포석도 가고 민촌도 갔지만 그들이 남긴 작품은 본인들의 체취가 오롯이 담긴 분신으로 그들의 삶과 시대를 증언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생각해본다. “사람은 가도 예술은 남는다”는 말을, “사랑은 가도 옛날은 남는다”는 노래가 된 시를. 아, 예술이란 이렇게 깊은 것이다. 추억 속의 옛날은 이렇게 손에 잡힐 듯 아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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