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주완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부소장

맹주완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부소장

[동양일보] “그 모양새를 상세히 구경하려는 즈음, 갑자기 요란스런 풍악을 울려댔다. 엉겁결에 두 사람은 귀를 막고 도망쳐 버렸다. 나 또한 두 귀가 먹는 듯하여 손을 흔들어 소리를 멈추라 해도 영 들은 척을 안했다. 다만 힐끔힐끔 돌아보기만 할 뿐, 그냥 불어대고 두드렸다. 나는 상례(喪禮)를 보고 싶어서 발을 옮겨 대문 앞에 이르렀다. 갑자기 문 안에서 상주(喪主) 한 사람이 뛰어나오더니 내 앞에 와 울며 대막대를 던지고는 두 번씩이나 절을 하였다. 엎드릴 땐 머리가 땅에 닿도록 조아리고 일어설 땐 발을 구르며 눈물을 비오듯 쏟아냈다.” 호기심 많은 연암(박지원)은 중국 사행길에 우연히 맞닥뜨린 초상집의 상례과정을 <열하일기>에 상세히 적고 있다. 연암은 풍악을 울리고 나팔을 불며 조문객을 맞이하는 연희성에 흥미를 느꼈다.

장례를 치르면서 망자의 영혼이 또 다른 생명으로 부활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풍악을 울리며 춤을 추는 전통은 조선시대에도 있었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상여를 메고 운반할 때 악기를 연주하고, 춤을 추고, 노래 부르며, 술과 음식을 마련해 광대들까지 불러 떠들썩하게 놀이와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조선시대 전통장례문화는 <국조오례의>를 근간으로 했지만 일제 강점기인 1934년 조선총독부는 의례준칙을 공표하고 관혼상제 예법을 간소화하는 과정에서 상례의 연희성을 근절시켰다. 일제는 문화 말살주의 정책의 일환으로 궁중 음악양식의 변화도 꾀하였다. 대한제국 황실을 일본천황의 친족 수준으로 격하시켜 궁중연향(宮中宴享)에서 연례악(宴禮樂) 연주를 금지하였다. 일제는 전통음악에 민족의 시원과 정체성이 담겨 있음으로 민족의 흥취와 신명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여 통제한 것이다.

유학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조선시대는 당연히 예법이 사법보다 상위에 있었다. 국가 행사를 치르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음악이었고, 음악을 통치수단의 하나로 인식하여 오늘날 국립국악원에 해당하는 ‘장악원’을 예조에 두었다. 1416년 태종대에 고불 맹사성(1360~1438)은 음악과 의례를 관장하는 예조판서에 임명되어 왕실에서 벌이는 연회의 연출기획을 도맡아했다. 고불은 조선 개국공신의 시호를 잘못 정한 죄로 태종대에 파면되는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오해가 풀려 태종의 신임을 받게 되었고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과 왕대비의 덕행을 찬미하는 가사를 짓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작곡가 겸 지휘자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고불은 상왕 찬미가를 잘 한 공로로 말 한 필을 선물로 받기도 하였다.

고불은 고려시대 이래 전해져 오던 노래 중에서 저질스런 가사가 담긴 노래들을 배격하고 유교사상에 부합하는 가사로 음악을 새롭게 작곡하였다. 종묘제례악으로 사용할 곡으로 생전에 조상들이 듣던 음악에 관심을 갖고 향악(한국 고유 음악)과 아악(중국 고대 음악)을 함께 섞어 연주하는 오래된 관행을 깼다. 고불은 종묘제례악에서 조상을 위해 연주하는 음악으로 향악이 합당하다는 견해였고, 음악의 행정사무를 관장하던 관습도감 제조를 지내며 조선 궁중음악의 자주성을 염두에 두고 악공들에게 새로 지은 곡을 연주하게 했다. 심지어 고불은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데 아악만을 써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하며 향악을 연주하고 존속시켜서 조선의 전통음악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는 견해였다.

고불은 조선만의 독특한 음악 세계를 개척하여 문화적 독자성과 자주성을 과시하고자 하였고, 왕이나 세자, 높은 관리들이 조정을 출입할 때 사용할 다양한 문묘 제례악을 작곡하여 엄중하고 극적인 어전 분위기를 연출하였다. 고불은 의례에도 조예가 깊어 세자의 혼례를 주관하면서 혼례절차를 진행하였고, 태종이 승하했을 때는 장례도 주관하였다. 고불은 태종의 시신을 씻기고 입안에 구슬과 쌀을 넣는 염습을 직접 하였고, 관위에 ‘세상을 떠난 뛰어난 덕과 신기한 공적을 쌓은 태상왕의 관’이라는 글씨도 직접 썼다. 고불은 신분차별을 없애기 위해 죽어서도 제사에서 차별을 받는 차등봉사(差等奉祀)에서 사대봉사(四代奉祀)로 바꿀 것을 주장했지만 당시에는 관철시키지 못했다.

맹사성은 1435년 76세로 좌의정으로 정년하기까지 8년간 정승으로 세종을 보좌하였고 충남 온양(아산)으로 내려와 계절의 변화에 따라 유유자적하며 소요하는 삶이 임금의 은혜임을 노래한 <강호가시가>를 짓고 옥피리를 불어가며 자연과 벗하면서 1438년 10월 79세의 나이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