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강찬모 문학박사·진천 포석조명희문학관

[동양일보]포석의 소설 ‘낙동강’은 한국 근대문학의 이정표를 새롭게 쓴 걸작으로 프로문학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문학이 단순한 삶의 여기(餘技)가 아니라 세상과 현실을 바꾸는 강력한 수단이며 도구라는 굳은 신념의 소유자들이 지향했던 일단의 문학적 이념이 ‘프로문학’이다. ‘낙동강’을 큰 틀에서 개관해 보면 주인공과 주동 인물들의 동선이 ‘떠나고 돌아오고 다시 떠나는’ 구조로 되어 있다. 전개 과정이 대략 이런 구조일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한 이유는 ‘표제 그림’이 암시하는 여운 때문이다. 표제 그림은 제목을 선명하게 하거나 보완하는 역할을 하는데 뜻과 의미 전달이 근원적으로 한계가 있는 문자의 맹점을 윤곽으로 형상화된 그림은 독자의 이해를 돕는 데 유용하다. 이런 면에서 표제 그림은 한 작품의 전체를 상징하는 ‘얼굴’인 셈이다.

‘낙동강’의 표제 그림을 보면 4인 가족(부부와 남매)이 캄캄한 새벽 ‘나루’를 향해 무엇인가에 쫓기듯 황급히 야반도주하는 슬픈 뒷모습을 하고 있다. 가장인 남편은 짐을 지고 아내는 짐을 인 채 젖먹이를 업고 왼손으로는 댕기머리 어린 딸의 손을 오른손으로는 머리 위에 인 짐을 잡고 있다. 아낙이 머리에 인 짐은 ‘보따리’다. 이때의 보따리는 남부여대(男負女戴)의 부평초 같은 고단한 삶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한갓 희망을 상징하는 우리의 자화상이며 머리 위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낙동강’은 일제 강점기인 192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민족혼을 말살하기 위한 일제의 내선일체가 본격화되고 무자비한 경제 침탈로 고향(고국)을 떠나는 유이민(流移民)들이 거리마다 장사진을 이루던 시기를 배경으로 한다. 고향 떠난 이들을 환영하는 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배제와 차별, 설움과 절망으로 점철된 ‘뿌리 뽑힌 자’의 비애뿐이다.

필자가 이 소설에서 주목한 것 중 하나가 아낙이 머리 위에 인 ‘보따리’다. 그러나 ‘보자기’가 없으면 보따리도 꾸릴 수 없다. 보따리가 “보자기로 물건을 싸서 꾸린 뭉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따리는 보자기가 만든 너무나 한국적인 일종의 ‘만능 가방’인 것이다. 한류로 보면 ‘K-보자기’라고 할 있다. 우리 역사에서 보자기는 계층과 신분에 따라 다양한 색깔과 문양으로 활용되어왔지만 변하지 않았던 것은 주는 이의 ‘고운 마음’이다. 궁중과 사대부가에서는 화려했으나 사치스럽지 않게, 풍족하지 않았던 서민들의 삶에서는 소박하지만 누추하지 않게 무던한 살림을 이어주는 어미 새의 근면한 ‘부리’였고 부지런한 ‘날개’였다. 부리 안에 넣고 담고 채워 보금자리에 온전히 전달되도록 소망하는 날갯짓은 귀소(歸巢)하는 모든 어미 새의 보람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어미 새의 이런 헌신으로 뼈가 굵어진 손이 까만 새끼 새들이다.

이어령은 일찍이 ‘우리 문화 박물지’란 책에서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 감추어진 문화 유전자 63개를 선정해 예로 들면서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탐색했는데 이때 보자기는 ‘탈근대화의 발상’이란 주제로 가위, 갓, 거문고, 버선, 맷돌 등과 함께 포함된 바 있다. 그는 또 보자기는 “싸는 물건의 부피에 따라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하며 물건의 성질에 따라 그 형태도 달라진다”며 보자기가 갖고 있는 특유의 ‘다기능’과 ‘융통성’을 갈파했다. 그러면서 “만약 모든 도구, 모든 시설들이 가방이 아니라 보자기처럼 디자인되어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철학을 담게 된다면 인류 문명은 좀 더 인간적이고 더 편하지 않겠는가“라며 보자기 예찬을 했다.

‘낙동강’의 주인공 박성운은 고국을 떠나 남북 만주, 노령, 북경, 상해 등을 방황하다 다시 돌아온다. 이때 무언가 손에 들었다면 보따리보다는 남성인 탓에 관습상 가방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그 대상이 아낙이었다면 보자기로 싼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있었을 것이다. 표제 그림 속 아낙도 박성운처럼 돌아왔다면 아마도 떠날 때와 같이 보자기로 싼 보따리를 이고 고향 땅으로 향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자기는 우리의 고난과 수난의 역사 속에서 서민과 아낙들의 삶을 위로하고 ‘희망 꾸러미’를 만들며 세상을 품는 ‘유연한 마술’이었다. 그러고 보니 진천에는 보자기와 관련한 흥미로운 스토리가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고 있는 것 같다. 보자기 작가(화가)로 유명한 김시현 씨의 고향이 바로 진천이기 때문이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참 아름다운 인연이다. 그래서 그가 끊임없이 발신하는 ‘소중한 메시지(The Precious Massage)’가 옛것 다시 보기를 통해 오늘과 내일의 의미를 되새기는 일인지 모르겠다.

한해가 또 저물어 가는 세모(歲暮)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과히 아쉽지 않다. 올해도 주변 사람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은 까닭이다. 그저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예쁜 보자기로 싼 선물 보따리를 한아름 안겨주고 싶다. 그 속에는 사랑과 정성이 있으므로. 그 사람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거기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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