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미영 수필가

민미영 수필가

[동양일보]결혼해서 시어머니와 21년을 함께 살았다. 어머니는 평소 매우 건강하셨기에 갑자기 쓰러지셔서 사흘 만에 돌아가셨을 때 온 식구가 충격에 빠졌다.

결혼해서 돌아가실 때까지 21년간 살았으니 길다면 긴 시간이다. 시어머니는 딸이 없고, 아들만 둘이다. 난 친정엄마가 안 계신다. 우리 엄마 기일 다음 날이 시어머니 생신이니 인연도 이런 인연이 없다고 생각하며 시어머니와 사는 것에 대해 조금의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다.

엄마가 안 계시니 시어머니께 잘 해드려야지 하는 마음이 가득했지만, 시어머니는 늘 아들 편만 들고 아들만 챙겨 서운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시어머니는 결코 내 친정엄마가 될 수 없음을 미리 깨달았으면 기대하지도 않는 건데 친정엄마 없는 며느리를 가엾게 여겨 당신 자식처럼 잘 챙겨 주실 거라고 믿었다.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일이다. 퇴근 후 저녁 준비에 한창일 때 하필이면 어머니가 그때야 청소를 시작하셨다. 온종일 집에 계셨으면서 며느리가 퇴근하고 집에 오기 전에 미리 좀 해 놓으시지, 지금서 청소하니 신경이 쓰이고 맘이 불편했다.

불편한 내 표정을 본 딸이 팔을 살짝 잡아당기며 조용히 말한다.

“엄마, 엄마가 청소해.”

“엄마 지금 밥 하잖아.”

“밥하고 청소하면 되잖아.”

“엄마도 놀다 온 거 아니야. 나도 힘들어”라고 말하자 딸이 하는 말이 “엄마는 젊잖아” 한다.

딸의 이 말에 갑자기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내가 가만히 있자 “엄마는 아빠 있잖아.” “엄마는 돈 벌잖아.”

이렇게 말하는 딸을 보자 머릿속이 하얘진다.

조금 전까지 어머님의 행동이 은근히 짜증 나고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딸 아이 처지에서 보면 할머니보다 엄마가 가진 게 훨씬 많은 그래서 할머니는 보호해주고, 도와줘야 할 사람으로 느낀 것이다.

젊다는 게 얼마나 큰 재산이고 힘인가? 남편이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없는 힘이고, 거기다 경제력까지 있으니….

“아유 손녀가 할머니 힘드시다고 저보고 하라고 성화에요. 얼른 놓고 들어가세요”했더니 어머님 표정이 표나게 밝아지며 “됐다. 내가 할게”라고 하면서 손에 힘이 들어가신다. 내 기억에 어머님은 기쁘게 청소하셨던 것 같다.

일상을 살아가면서 남편이 미울 때가 있는 것처럼 가끔 어머님이 미울 때가 있었다. 그럴 때 내 마음을 다스리는 힘은 오래전 딸이 내게 했던 말들이다. 힘 있는 자가 받아들이자 생각하니 화가 나거나 불평이 생기다가도 금방 서운한 마음, 미운 마음이 가라앉고 빨리 접게 되었다. 박영희 시인의 시 ‘접기로 한다’를 읽으면서 마음을 접는 일이 얼마나 관계를 부드럽게 하고 시시비비에 휘둘리지 않는 지혜인가 깊이깊이 깨달았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