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동양일보]어느 기관장의 초대로 대전시에 있는 한 정부기관을 방문했다. 정부청사는 건물의 크기나 이름이 갖는 권위로 솔직히 민간인들이 드나들긴 편하지 않은 곳이다. 그날 함께 방문하는 지인을 만나, 마중 나온 비서의 안내에 따라 검색대에서 가방을 검사하고 방문객 명패를 받고 차단문을 통과한 뒤 엘리베이터를 탔다. 단정하게 청색 수트를 입은 반가운 얼굴이 14층 기관장실에서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차담을 하며 폭풍 수다를 나눴다. 안부와 옛이야기와 최근의 동정들과 자녀의 결혼이야기, 그리고 궁금했던 기관의 업무와 국제관계일까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과거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는 ‘전문직여성한국연맹(Business & Professinal Women Korea)’이라는, 외교부 소속 사단법인 NGO의 회원으로 같이 활동을 했다. 그는 이 단체의 대표였고, 나는 뒤를 이어 그 직을 맡았고, 함께 간 지인은 임원이었다. 우리는 1968년 한국연맹이 창설된 지 46년 만에 처음으로 제주에서 세계대회를 함께 치른 스태프들이었다. 그새 9년이나 지난 일이지만 다시 생각해도 감동스러운 그 대회를 위해 노력했던 지난 시간들을 떠올리며, 완벽한 행사를 위해 노심초사했던 그를 우리는 ‘디테일의 끝판왕’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떠든 후 사무실을 나오는데 문득 낯선 풍경이 눈길을 끌었다. 직원들의 솜씨인 듯한 손글씨 편지와 캐리커처가 그려진 그림판이 기관장 테이블 옆쪽 벽에 붙어있었다. 권위적이고 경직된 것이 보통인 기관장의 방에 낙서처럼 자유로운 그림판이 붙어있다니. 그 모습이 소박하고 신선해 보여서 가까이 가서 읽어보니 기관장의 취임 300일을 맞아 직원들이 축하와 부탁을 하는 내용을 쓴 글과 그림이었다. 그림판 외에 포스트잇에 쓴 글들도 있었다.

내친김에 진열장을 둘러보았다. 역시 재미있었다. 청내 마라톤동호회가 함께 마라톤에 참가, 10km 완주를 했다고 사진이 담긴 기념패를 주었고, 산타복장으로 직원들과 소통간담회를 하는 사진도 있었다. 가장 눈에 띈 것은 감사패였는데 처음엔 잘못 보았나 했다. 감사패는 노동조합이 준 것이었다. “노사화합을 위해 보여준 상생의 모습과 직원에 대한 애정에 깊은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며 “조합원 모두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드린다”는 감사패를 읽으며 가슴이 따뜻해졌다.

‘기관장’과 ‘노조’ 관계의 최종 목표는 바로 ‘상생의 관계’이다. 노동조합이 무엇인가. 근로자가 주체가 되어 근로조건의 유지나 개선·기타 근로자의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는 것을 목적으로 자주적으로 모인 단체가 아닌가. 그런데 그 노동조합이 소속 기관의 기관장에게 감사패를 주었다는 것은 조합원들이 근무하는 환경이 개선되었거나 조합원들이 원하는 근로조건 등이 달라졌거나 향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어떻게 노동조합원들로부터 감사패를 받게 되었는지는 대화 중에 확인됐다. 그는 그 정부기관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공무원이 아닌 민간에서 들어온 기관장이자, 첫 여성기관장이었다. 자연히 그를 바라보는 시각이 호기심과 기대반 우려반이었을 것이다. 그는 부임 첫날 청내를 돌면서 2000명의 직원들과 인사를 나눴다고 했다. 그리고 ‘고쳤으면 하는 점, 바라는 점’을 제안받았다. 받고 나니 모두 463건이었다. 그중에 43개 항목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쉽게 할 수 있는 것부터 한 가지 한 가지씩 고쳐나갔다. 사무실의 칸막이 높이 조절부터, 민원전화 응대시스템, 9시30분~11시, 오후2~4시를 업무집중시간으로 정하고, 구내식당의 식단을 조정해 맛있는 점심을 먹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가족체육대회, 동호회 활동 활성화, 야외 소통만찬 초대 등 소통의 시간을 만들어 직원들과 자주 자리를 함께 했다. 지난해 여름엔 출근하는 직원들에게 컵과일을 나눠주고, 올 겨울엔 ‘미리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커피차를 불러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출근길 직원들에게 커피를 쐈다. 산타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으며 커피를 건네주는 기관장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마음이 어땠을지는 미루어 짐작한다. 청사를 빠져나오면서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그날 방문한 기관은 특허청, 그리고 기관장은 이인실 청장이다. 특허청은 며칠전 중앙부처와 전국 공공기관 등 69개 기관이 제출한 134건의 인사제도혁신 우수사례경진대회에서 대상인 대통령상과 인사혁신처장상을 수상하는 등 2관왕을 차지했다. 열린 기관장의 소통과 배려가 낳은 평가다. 그의 활약으로 우리나라 특허업무가 세계무대에서 빛이 나길 기대한다. <주필>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