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병철 소설가

강병철 소설가

[동양일보]마흔두 살 순자 씨는 ‘장롱 다리’ 체질이니 토실토실 도톰하고 몸이 짧다. 눈사람처럼 흰 살결 탓에 얼핏 농사꾼 아낙네처럼 보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오랜 외톨이 농투 성이 이력이 쌓이면서 여기저기 기미가 끼기도 한다. 스무 해 전 꽃가마 타고 두근두근 모시던 첫날 밤 기억도 아득한데, 아뿔싸, 그미가 석녀(石女)로 판명된 것도 운명이다. 신방 치른 이후 강산이 두 번 바뀌도록 아기 씨앗 하나 틔우지 못하더니 어느 날이었던가,

‘대를 이어야겠다.’

하여, 방앗간 서방님이 두 번째 장가가시는 걸 문설주 뒤에서 멀거니 바라만 본지 어느새 다섯 달 세월이 훌쩍 지났다. 새색시 들어오면서 바깥사랑채로 밀려 그미 혼자 날마다 독수공방에 빠지는 중이다.

새로 들인 여자는 젊은 만큼 예쁘다. 뽀송뽀송 열아홉 꽃띠 소녀, 낭창낭창한 싸리 회초리 허리 아래로 미루나무처럼 쭉쭉 뻗은 종아리가 때로는 눈물겹고 더러는 눈부시다.

‘내가 봐도 예쁘구나.’

어린 안방마님으로 들어선 새색시 그림자가 안마당에 나타날 때마다 물고기 비늘이 바스락바스락 쏟아지는 것 같다. 오줌이 마려워 뒷간 찾아 안마당 가로지르던 순자 씨가 귀 기울이면 설핏 늙은 서방과 딸내미 같은 새색시 신음으로 문풍지 소리가 부르르 떨리기도 한다.

‘저런 거 잊은 지 한참 되었네.’

밤하늘 복판으로 초승달 한 조각 청소하듯 미끌미끌 빠져나가는 중이다. 우물가에서 종아리 씻고 몸을 움직인다. 갸웃갸웃 허리 매듭 묶고 사랑채 독수공방에 누울 때가 그래도 마음 편안한 이유를 모른다.

순자 씨가 호미 들고 고추밭 매러 대문 열고 나가면 조강지처 일터로 내보낸 늙은 신랑 젊은 색시 부부는 더 살판이 난다. 가래떡에 조청 찍어 하하호호 웃다가 민화투도 한판 벌이니 깨가 쏟아지는 신혼살림이 틀림없다. 이번에는 오토바이 뒤에 어린 색시 태우고 오일장 신작로 다녀오는 소리도 들린다. 마늘밭 매던 순자 씨 허리 편 채 오토바이 그림자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만 본다. 해꼬리가 서산으로 저무니 지금은 신방 차린 지아비 밥상 차리러 징검다리 넘는데

초저녁 된장찌개 투가리에 오른 적돌만 참조개 아가리 딱딱 벌렸다. 개다리소반 들고 툇마루에 오르다 아차, 시끈대는 신음소리 놓치고 문고리 먼저 푼 것이다. 어느새 일을 벌인 것일까. 칭칭 똬리 튼 구렁이 암수 두 마리 아주 잠깐 정지 화면으로 멈춘 것이다. 이불 속으로 알몸 숨기는 새색시, 그 순간 두 여자의 지아비가 벌떡 일어서며 하필 본댁 그미에게만 주발 안에 든 홍시 하나 집어 던졌는데,

‘나갓!’

두 번째 홍시가 노랑 저고리 앞섶에 맞아 빨갛게 젖은 것이다. 괜찮다, 괜찮다. 뒷걸음친 그미, 우물가 두레박 줄 잡고 비릿한 살 내음 오랜만에 떠올리며 더운 몸 식히려 팔목 적신다. 우물로 북은 홍시 자국 슥슥 닦아낸 자리로 젖가슴 흔적이 뾰루퉁 드러날 판이다. 대숲 넘은 땅거미 어느새 초가지붕부터 넘어오는데 흰 빨래 검은 빨래 희고 검게 박박 밀어 바깥마당 빨랫줄에 널어놓는다. 노랗게 일어서는 달맞이꽃 만나 이제야 등허리 눕히니 어느새 썩은새 같은 어둠으로 하염없이 편해지는 중이다. 다시 독수공방의 밤이 스물스물 열리더니 어느새 코 고는 소리 들린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