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나 사회적경제활성화충북네트워크 사무국장

이한나 사회적경제활성화충북네트워크 사무국장

[동양일보]헨리 조지는 토지의 독점을 통해 모든 지대가(대부분의 사람은) 지주에게 흡수되어 노동자는 빈곤선 수준의 임금을 누릴 수 밖에 없음을 그의 책 ‘진보와 빈곤’을 통해 설명했으며,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임금은 잉여가치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자본가의 경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면 결국 잉여가치를 쥐어짤 수 밖에 없고, 이는 노동자의 계급투쟁으로 이어져 자본주의의 종말을 고할 것이라 예견했다.

그들이 바라던 유토피아는 모두 이 땅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지적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 있다. 계급 사회로 묘사되는 사회의 안정성은 매우 강력한 철옹성이 되어버려,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기는 커녕 매일의 삶에서 유리천장에 부딪혀 좌절하며 생산요소를 소유한 자본가가 되기 위해 로또를 긁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 일쑤다.

본래 성경에서 최초의 노동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일. 바로 창조하신 생명체에 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생명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매우 아름다운 일이었다. 하지만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노동은 고통(toil)으로 변해 버린다. 하나님의 은혜로 양을 치던 야곱의 삶이 아니라 아무리 경작해도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이삭의 삶이 바로 지금 죄악 속에서 고통 가운데 노동하는 인간의 삶이다.

인간의 죄악은 부를 쌓으며 땅을 연하게 하여 지배와 피지배계급을 낳았고, 그 안에서 고통하며 신음하는 노동자를 양산했다. 모두가 생산요소를 소유한 자본가가 되기 위해 같은 길로 달려가는 시지프스의 삶이다. 하지만 모두가 자본가가 되기 위해 달려간 결과는 지독한 인플레이션 뿐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받아든 성적표는 경제불황, 전염병, 국지전, 더 이상 쾌적하지 않은 지구이다. 노동을 고귀하게 여기신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야 할 때가 매우 시급해 졌다. 사회적 경제는 그 정신을 구체화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는지 모른다. 구성원의 자율, 민주, 자발적 참여, 호혜성을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경제는 기업주와 노동자 모두 자본주의의 탐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방향을 제공할 것이다.

소회계층의 경제활동 참여를 독려하는 사회적 기업, 함께 소유하고 민주적으로 운영하여 지역의 공동체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협동조합, 지역의 필요와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아는 마을 주민이 주체가 되는 마을기업, 수급자 또는 저소득층이 서로 협력하여 탈빈곤을 위한 자활사업을 운영하는 자활기업 등 사회적 경제의 주체들은 자신들이 경제활동의 주체가 되어, 우리가 이제까지 겪어오던 노동소외를 극복하고 자조적인 경제모델을 창출해 나갈 것이라 확신한다. 협동조합의 아버지 로버트 오언, 전원도시를 실현하고자 한 도시계획가 에베네저 하워드가 꿈꾸던 유토피아는 공상적 사회주의라 치부하기에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너무나 크다. 노동자는 상품도 아니고 생산요소도 아니고, 자본가가 되려고 달음질하는 사회계급도 아니다. 자신의 삶에 대한 존엄을 소유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인정 받아야만 한다. 그러기에 사회적경제조직의 확대는 선택의 문제가 아닌 필수의 영역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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