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수필가

김영미 수필가

[동양일보]친정어머니께서 유난히도 커다란 늙은 호박을 내게 안겨주신다. 늙은 호박 꼭지를 보니 웃음이 났다. 꼭지가 유난히 크고 실해 보인다. 그것을 가슴에 꼭 안은 나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올해는 무성한 호박잎에 가려서인지 제때 수확하지 못해 늙은 호박이 많이 열렸다. 주위가 온통 초록으로 풀냄새 사방에 퍼지고 나뭇잎들이 무성할 때쯤 호박은 제 몸을 충분히 불리기 시작한다. 비탈진 길을 만나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만의 영역을 넓혀간다. 또 큰 나무를 만나도 좌절하지 않으며 큰 나뭇가지도 언덕도 호박넝쿨에겐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니다. 끝이 동그랗게 말린 넝쿨은 지나온 길 뒤돌아보지 않는다. 앞으로 나갈 길은 머뭇거림 없이 쭉쭉 뻗어나간다. 그러다 어느새 찬바람 불고 풀벌레 소리 가까이 들릴 때면 호박은 푸른빛에서 누런빛으로 서서히 익어간다.

모양이 맷돌처럼 둥글납작하게 생긴 것을 맷돌 호박이라고 한다. 내년 여름 호박즙을 내어 곧 아기 낳을 며느리에게 주려고 농막에 늙은 호박을 차곡차곡 쌓아둔다. 볏 짚 위에 나란히 놓여있는 맷돌호박은 누렇게 제대로 익어 뽀얀 분이 나와 마치 분칠한 얌전한 여인 같다.

호박은 어린 것을 애호박이라고 한다. 또 잘 익은 것을 늙은 호박이라고 한다. 잘 익은 호박을 늙었다고 하는 게 맞는 걸까. 사과나 토마토는 잘 익어도 늙은 사과, 늙은 토마토라고 하지 않는다. 이래저래 호박으로서는 억울하지 않을까 싶다. 노사연이 부른 바램이란 노랫말에는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확실히 늙었다고 하는 것보다 익었다고 하는 것이 듣기도 좋고 정감이 더 간다.

왜 다른 식품이나 과일, 채소는 잘 익었다고 하면서 호박은 늙었다고 하는 걸까. 호박은 늙어 잘 익을수록 당분과 영양분이 더 증가한다고 한다. 늙은 호박의 당분은 소화 흡수가 잘 되고 위장이 약한 사람이나 회복기의 환자에게 특히 좋다고 한다. 또 전분이 풍부하고, 소화 흡수가 잘되는 당질과 비타민A의 함량이 높다.

우리는 태어나서 나이 들고 죽음을 맞는 과정은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다. 나이 든다는 것에 순응하는 일은 나를 돌아보며 늙어가는 일이 아닐까. 그런데 나이든 어르신에게 늙었다고 하면 기분 좋을 사람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잘 익으셨다고 하면 기분 좋을까.

꿈에서 깨어나 맷돌 호박을 보니 웃음이 난다. 친정어머니께 꿈 얘기를 하니 손주 볼 태몽이라고 좋아하신다. 이 소식을 며느리에 게 알리고 싶어 며느리에게 전화했다. 며느리는 태몽을 꾸고 싶은데 아무 꿈도 꾸지 못했단다.

크고 묵직한 놈을 골라 반으로 갈랐다. 호박씨를 발라내고 속을 파내고 껍질을 깎는다. 늙은 호박으로 오늘 저녁 호박죽을 끓였다. 호박죽은 확실히 늙은 맛보다 익은 맛이 훨씬 나은데…. 나는 과연 늙어가는 걸까, 익어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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