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시인

나기황 시인

[동양일보]#1 갑진년 새해가 밝았다. 푸른 용의 해가 시작됐다. 영속의 세월에서 보면 365일을 구분해 놓은 눈금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새해는 ‘새해’라서 좋다. 새해는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좋다. 희망과 설렘이 있어 좋다. 희망과 설렘의 결과를 앞당겨 알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21세기 최첨단 문명의 시대에도 연초만 되면 운수 풀이가 여전히 인기를 누리고 있다. 한 해 운세를 점치는 무료 앱이 포털사이트 앞자리에 놓이고, 토정 이지함 선생의 ‘토정비결’도 한 번쯤 봐야 하는 필수아이템이 됐다. 겉으로는 가벼운 놀이 정도로 치부하지만, 기실 행운을 기대하는 욕구가 반영된 풍속(風俗)형 풍향계인 셈이다. 지구상에서 시간개념을 가진 유일한 종(種)이 인간이다. 미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풍향계’ 적 사고방식이 어쩌면 인류 문명사의 원동력이 됐는지도 모른다.

#2 그때 그 시절, 추억 속의 풍향계도 있다. 아마 80년대 이전에 초등학교를 다닌 세대들은 화단이나 둔덕에 설치돼 있던 ‘백엽상(百葉箱)’을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얇은 나무판자를 덧대어 만든 흰 페인트칠을 한 조그만 집 모양의 나무상자로, 그 안에 온도계와 습도계가 있었다. 백엽상 옆엔 맞춤처럼 풍향계가 있었다. 깃대 모양의 지주대 위에서 바람개비를 단 방향타가 돌아가고, 그 회전축 중심에 양철로 만든 닭 모양의 실루엣까지 눈에 선하다. 필자는 갑자기 좋은 일이 생기거나, 뭔 잘못으로 가슴이 쿵쾅거릴 때면, 나도 모르게 풍향계 앞으로 달려가곤 했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끄덕이며 돌아가던 화살촉을 넋 놓고 바라보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져 어느새 상상 속 나라에 가 있곤 했다. 무심히 도는 바람개비조차 현재의 방향으로 나를 이끌어 준 무수한 인연의 하나였음을 나이 들어 깨닫는다.

#3 ‘바람 부는 대로’ 돌아가는 것이 풍향계다. 자유분방해서 예측이 어렵지만, 순응하거나 거스르거나 분명히 결괏값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구촌 기후변화가 그렇고, 세계 경제 동향이 그렇고, 국내외 정치판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렵다.

올해 <트렌드 코리아 2024>에서 선정한 10가지 키워드의 조합은 ‘DRAGON EYES(화룡점정)’이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팀은 매년 그해를 상징하는 동물의 영문자 첫 글자를 시작으로 10가지 소비트렌드 키워드를 선정해왔다. 올해는 ‘용의 해’를 나타내는 ‘Dragon’의 첫 글자 ‘D’로 시작하는 ‘분초사회(Don't Waste a Single Second)’를 대표 키워드로 정했다.

‘단 1초도 허비하지 마라’는 의지를 담은 신조어다. ‘분초사회’는 ‘시간이 곧 돈이다’라는 사회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시간 재화(財貨)인 분초를 아껴 쓰고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는 소위 ‘시간의 가성비’를 따지는 시대가 도래했다는 얘기다.

값이 아무리 싸도 오래 걸리는 것은 매력이 없다. 거기에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의 등장이 트렌드의 한 축을 이루면서, ‘분초사회’를 확산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하게 됐다.

다행인 것은 10개의 키워드를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로서 ‘화룡점정(畵龍點睛)’을 꼽고 있다는 점이다. 인공지능과 함께 살아가는 디지털 문명의 중심에서도 결국은 사람에 의한 ‘휴먼 터치’가 있어야 비로소 완성된다는 의미다.

# 본지 오피니언 코너 <풍향계>로 눈을 돌려보자. 2024년엔 또 어떤 글이 재미와 추억과 시대의 징표를 보여주는 ‘화룡점정’의 역할을 하게 될까. 풍향계의 숨은 키워드는 삶의 방향성을 제시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처하는 지혜를 제공하는 데 있다.

유수 언론지 못지않게 건전하고 따뜻한 글로써 독자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쳤으면 한다.

순한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잘 읽히는 <풍향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필진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에게 하는 주문이기도 하다. 갑진년, <풍향계>에 불어올 바람의 방향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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