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보영 수필가

송보영 수필가

[동양일보]푸지다. 간밤부터 내리던 눈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여전히 쏟아져 내리고 있다. 한 해를 보내면서 상흔으로 얼룩진 것을 모두 덮어 버리겠다는 심산인지 참 허벅지다. 오늘 나와 마주한 창밖의 풍경들은 자우룩이 내려 쌓이는 눈꽃들로 마른 목을 축이며 환호하는 대지의 웃음소리로 가득하다. 겨울의 중심에서 알몸으로 서 있는 나목들의 모습은 허허롭기 그지없고 안쓰러울 만큼 남루해 보였었는데 메마른 땅 위의 모든 것들 위로 새 생명을 불어넣기 위한 순백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다. 섣달그믐에 내리는 눈은 하늘의 축복이다.

제야의 종소리와 더불어 묵은해는 가고 새해가 도래했다. 그날이 그날인데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뭐 특별한 일이냐고 반문하겠지만 쉬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일지라도, 일단 끝맺음하고 다시 새롭게 시작한다고 하는 것은 축복이다. 지난해를 돌아보면서 그래도 할 일 했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을 발판 삼아 힘차게 발돋움할 수 있어 좋다. 설혹 엄동설한만큼이나 시퍼렇게 가슴 시린 날들을 견뎌냈다면, 애타게 아름다운 세속의 갈망으로 몸살을 앓았던 일들이 있었다면, 이 또한 내가 성숙해 가는데 밑 거름이 되었을 터. 이 모두는 새로운 내일을 살아가는 자양분이 될 터이기에 새해를 맞는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보내고 맞이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보내야 할 것만 있고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맞이할 것이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렇지만 우리네 삶 속에는 새로운 것들을 위해 발돋움할 무엇인가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소년의 때를 지나면 청년의 때가 있고 청년의 때를 지나면 또 다른 날들이 기다리고 있다. 거슬러 갈 수 없는 한 때의 시간 중 한 부분이 좀 어긋났다 해도 다시 일어서면 될 일이다.

신년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인생은 꿈꾸는 자의 것이니 꿈을 꾸라 한다. 작심삼일이 될지라도 꾸지 않는 것보다는 꾸는 편이 낫다고 속삭인다. 가슴 한켠에 웅크리고 있는 미완의 것들을 이루기 위해 마음의 빗장을 활짝 열고 나오라 한다. 때로는 된 바람이 휘몰아칠까 두렵기도 하겠지만 그 바람과 맞서지 않고는 삶의 작은 둔턱도 넘을 수 없다며 다그친다. 삶의 길목에서 머뭇대다 예정된 빛나는 순간들을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며 채근한다. 우리는 그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가 보내는 눈길에 포커스를 맞추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한다.

누군가 내게 아직도 설레는 순간이 있느냐고, 눈부신 날들에 대한 기대가 있느냐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리라. 지금도 여전히 나는 꿈을 꾼다. 젊었던 날에 꿈과는 다르지만 소소한 일상을 통해 꿈이 이루어지길 바라고 기다리는 순간 설렌다. 작지만 소중한 꿈이 이루어졌을 때 눈물 나게 기쁘다. 이것이 나를 살게 하는 힘인지도 모른다고. 설렘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기 위한 디딤돌이다. 또 다른 시작을 위해 발돋움하는 모습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정월 초하룻날 이 아침에 소소하면서도 간절한 바람을 가슴에 품는다. 거리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시끌벅적하기를, 삶의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는 젊은이들의 터전이 속히 마련되기를, 힘겹고 고단하지만, 소임을 기쁘게 감당하는 우리의 가장들의 삶이 좀 덜 팍팍하기를, 생의 막바지를 건너는 이들이 좀 더 평안하기를. 새해 벽두에 이 모두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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