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창건된 불교 유적 보물 459호 ‘칠층모전석탑’ 자리 & 법해 스님, 불사 일으켜 장락사 창건 고탑 명맥 이어

장락사 칠층모전석탑.
장락사 칠층모전석탑.

[동양일보 장승주 기자]충북 제천시 장락동 고암천변 탑안로8길 24에 위치한 ‘장락사'(주지 지광 스님)

이 사찰은 1967년 보물 459호로 지정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이 있다. 장락사지는 제천지역에서 확인된 불교 유적 중 가장 이른 시기인 삼국시대에 창건된 불교 유적이다.

통일신라~조선시대에 폐사될 때까지 여러 번 중창이 이뤄졌던 불교 유적으로 본래 장락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이래 17세기까지 존속하다가 18세기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장락사지는 장락리(동)사지, 蒼樂寺(창락사)터 등으로 불리던 곳으로 발굴조사에서 ‘長’자명 기와편이 확인돼 장락사(長樂寺)로 밝혀졌다.

<태종실록>에 태종 7년에 명찰에 대신할 자복사를 선정하는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이때 명단에 천태종 소속의 제천 장락사가 포함돼 있다.

현재 장락사지 동쪽에는 현대에 지은 장락사가 위치하고 서쪽으로는 고암천이 흘러 남쪽에서 제천천에 합류한다.

사지의 남쪽에는 제천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이 있고 사지 내에서는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 기와류가 많이 수습됐다.

발굴조사가 마무리된 후 지금은 일부 건물 터의 초석을 살려 건물의 모습을 살리고 잔디를 심어 정비했다.

특히 장락동 칠층모전석탑은 6.25 전쟁 당시 포탄에 맞아 1층 탑신부와 옥개석의 남쪽과 동쪽 면, 2층의 동남쪽 옥개석·탑신부까지 피해를 입었으나 1967년~1968년에 해체해 현재의 모습으로 보수했다.

1967년 모전석탑이 보물로 지정되면서 해체보수를 통한 기단부 조사가 이뤄졌다.

석탑은 1단의 지대석을 놓고 칠층의 탑신부를 쌓았으며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고 노반석까지만 남아 있다.

지대석은 남면에 판석 1매를 놓고 북면에는 장대석 4매를 연결했으며 동면에 별도로 3매의 석재를 보완해 전체적인 방향을 맞춘 구조다.

조사에서 지대석 하부에서는 사리장치 석재 1점이 확인됐고 서북측 흑갈색 부토 내에서는 금동여래입상 1점 등이 무질서하게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탑신부는 암회색의 모전 석재를 이용해 축조됐고 탑신부 각 면에는 곳곳에 회칠을 한 흔적이 확인됐다.

1층 탑신석은 화강암으로 된 방형 기둥을 세우고 그 내부에 석재를 쌓았고 화강암제 기둥을 세운 형태는 다른 모전석탑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점이다.

감실은 남-북면에만 조성됐으며 화강암에 장대석으로 문틀을 짠 후 내부에 2매의 판석으로 좌·우 문을 따로 만들어 단 형태를 갖추고 있다.

모전석탑의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후기인 9~10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탑신부와 1층 탑신석의 형태가 통일신라 때 창건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안동 법흥사지 전탑·안동 조탑리 오층전탑과 유사하며 탑이 위치한 입지조건이 통일신라 때 건립된 전탑들과 같이 하천변 평지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모전석탑은 수많은 석재들이 겹쳐져 결구되는 특성상 전탑보다 내구성이 더 강하다. 이 탑에서도 그런 내구성을 볼 수 있다.

장락사 칠층모전석탑은 천년 전 원형 거의 그대로 현대까지 보존돼 당시 제천 지역의 석조공예술을 연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현재의 장락사는 송학산 강천사에서 수도하던 수도승 법해(法海)스님이 1964년부터 상주하면서 불사를 일으켜 창건한 것으로 탑 뒤에 초막을 짓고 주석한 후인 7년 후에 법당을 신축하여 지금의 장락사(충청북도 제천시 탑안로8길 24)를 창건했다고 한다.

이후 법해스님은 탑 주변을 정비하고 꾸준히 불사하였으나 노쇠해 1973년 2월 9일에 열반하자 그해에 성원(聖元)스님이 주석하면서 관음전을 신축하고 석조관음보살입상을 봉안해 지금의 가람을 이룩했다. 제천 장승주 기자 ppm6455@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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