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김주희 침례신학대 교수

[동양일보]정초, 새로 마주하는 시간들을 가늠하는 시절이다. 살아갈 시간을 앞에 놓인 것으로, 살아낸 시간을 뒤에 두고 왔다고 여기는 건 어쩌면 인간의 마음이 몸에 기반한다는 ‘신체화된 마음(embodied mind)’일 수 있겠다. 우리는 만물을 사람 신체로 빗대 이해하는 게 익숙하다. 추상적 시간도 사람 신체로 은유해서 쉽게 이해하려고 한다. 살아갈 시간은 앞에 놓인 것으로 우리 신체를 중심으로 본다. 시각적 경험치로 미루어 앞의 시간은 새로움, 출발, 희망, 기회, 모험들로 기대되고, 지난 시간은 뒤를 볼 수 없는 신체의 특성에 미루어 뒤에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슬쩍 덧붙인다면 베르그송식으로 과거를 ‘기억’으로 미래를 ‘기대’로 경험한다면 우리는 결국 삶을 낙관적으로 경험하는 거라고 평화로운 결론을 이 시절이니 펼쳐도 될지.

새해 첫 기적이야기를 꺼내든다.

황새는 날아서/말은 뛰어서/거북이는 걸어서/달팽이는 기어서/굼뱅이는 굴렀는데/한날한시에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새해 첫 기적, 반칠환 시)

새해 첫 기적을 말하는 시 세계는 아름답다. 자연적 시간인 크로노스와 경험적 시간인 카이로스가 공존하는 신화적 시간대를 풀어놓는다. 새해 첫 기적에 황새, 말, 거북이, 달팽이, 굼뱅이가 불려나왔다. 이들은 서로 사는 데도 다르고, 생태도 다르다. 만날 일 없을 것들이 한 데 도착한다. 누구도 늦거나 이르지 않게 한날한시에 똑같이 도착했단다. 여기서 한날한시는 중요하다. 대등해지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도착지는 새해 첫날이라는 시간. 새해 첫날에 시공간은 긴밀하다. 시공간이 내밀한 연관성을 갖는 ‘크로노토프(chronotope)’의 세계.

모든 생명체에게 시공간은 나뉠 수 없다. 생명은 신체 속에 깃들어 일정 공간을 점유하면서 생존해 나간다. 어느 실제 공간이고 어떤 생명체가 제게 부여된 시간만큼 점유하다가 비우는 반복이 일어나는 셈이다. 시간이 되면, 때가 되면, 시절이 다하면, 한 시대가 저물면, 한 살이를 마치면 또 다른 생명체가 그 공간을 점유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새해 첫날이다. 시간은 모두에게 동일하다는 명제를 시인은 구체적 놀라움으로 경험한다. 시 속의 생물들은 각자 날고 뛰고 걷고 기고 구른다. 다른 차원에 산다. 새나 말은 땅 뿐 아니라 공중이라는 삼차원적 공간을 휘젓고, 배로 밀고 구르는 것들은 이차원적 선의 움직임으로 살아간다. 세계 자체가 다르다. 규모로 본다면 날아다니는 황새와 구르는 굼뱅이는 비교할 수 없다. 평생 굼뱅이가 움직이는 공간은 황새가 단 한 차례 비행한 거리도 안될 수 있다. 우리 사는 일도 그러할까, 누구는 나는 듯이 살고, 누구는 구르는 듯이 사는 일로 이행해 볼 수도 있을까. 아니 한 사람의 생애에도 나는 것 같은 때가 있고, 기어가는 듯한 때가 있을까.

새해에 생물들은 대등하게 등장한다. 날개짓 큰 황새도 빠른 말도 느린 거북이, 달팽이, 굼뱅이도 한날한시에 도착한다. 규모로는 비교할 수 없이 차이나지만 새해라는 시간 앞에서는 대등하다. 이 대등함을 시인을 놀란 눈으로 감탄한다. 거기에 연을 나눠 한 마디를 덧붙인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더라고.

질적 시간의 탄생, 새해라는 시간 앞에서 모두는 대등하고 당당하며 우열이 없다. 공평하다. 생태는 다르지만 시간의 본질 앞에서는 대등하다. 새로 시작되는 새해 첫날은 모두 거기까지 살아내고 도착했다는 공통사항만 있다. 이제 각자는 또 한 해를 제 생태대로 살아갈 것이다. 하늘을 날거나 땅 속에서 주로 살거나 어쨌거나 제 생물종의 특성대로 깜냥을 다해 살아가게 될 것이다. 바위조차 움직이지 못하는 제 속성대로 그 자리에서 시간을 맞고 보내리라.

살아있는 한 해마다 그들은 또 한날한시에 새해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지 새해 뿐일까. 모든 순간은 신화적 시간의 반복일 수 있겠다. 한날한시에 도착하는 기적 이야기는 등 두드려주는 응원으로 읽는다. 새 시간을 빛나게 살아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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