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증평군수

[동양일보]지역 경쟁력을 갖는 요소로 경제 관련 지표가 많이 쓰인다. GDP, GRDP, GNP 등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해 소비하는 과정으로 보면 경제활동이 가장 범위가 크다고 할 수 있으나 주민의 행복이나 삶의 질을 경제만으로 단정짓기는 어렵다 할 것이다.

오히려 지역이 어떤 생활 모습을 가지고 있고 전대에는 어떤 일상으로 사회관계가 형성됐는지 등의 정신문화와 문화유산이 중요하다는 것은 유네스코에서 보존할 가치가 있는 보편적 문화유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관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증평군이 군(郡)으로 개청 된 지는 20여 년 이지만, 근현대역사와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는 정신적 물질적 유산이 대단하고 위대한 지역이다. 군 이전에 읍에서 면 그리고 리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새겨진 역사와 그 이전의 지리적 그리고 문화적 생활상은 독특함으로 차별된 흔적들이 많다. 지리적 중심지로서 한성백제 시대인 4세기 중엽에 흙으로 쌓은 성으로는 최고의 규모인 추성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시화 마을과 행갈 마을을 중심으로 한 추성산성은 삼국시대에 전략적 요충지이며 반드시 지켜야 하는 대규모 생활의 근거지였다.

근대에는 메리놀병원이 증평성당 자리에 위치하고 1957년도부터 내과, 소아과, 산부인과를 진료하며 1년에 6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였다. 대한민국의 의료중심지로서 역할을 해왔던 증평은 아쉽게도 메리놀병원이 1990년대 폐원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시약소 건물은 원형 그대로 보전돼 지난해 증평군 등록문화재 1호로 지정됐다.

이렇듯 면면히 흐르고 있는 역사와 추상같은 인물들의 기개는 정신문화 차원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져 1960년대부터 증평군 설립을 위한 운동을 무려 40년간 지치지 않고 추진해 결국 이뤄낸 엄청난 잠재력과 원동력, 결기와 결의, 추진력과 행동력이 살아 넘치는 지역이 증평인 것이다.

증평은 1913년도에 증평이라는 지명으로 탄생한다. 증천과 장평의 증자(字)와 평자(字)를 집자해서 이름이 만들어졌다. 1914년에 증평면이 되었고, 35년 후인 1949년도에 증평읍이 되면서 지리적이나 역사적으로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증평읍사무소는 1956년도에 증평읍 장동리에 착공해 이듬해인 1957년 5월 30일에 준공했다. 지상 2층, 건평 140평과 부속건물 40평 규모의 건물로 낙성식 당시에는 충북도의 도지사, 경찰국장, 국회의원, 37사단장 등 주요 요인이 모두 참석할 만큼 의미가 남다른 건물이었다. 1984년 읍사무소가 창동리로 이전하면서 행정기관 사용이 중지됐다.

현재 이 건물은 예식장으로 운영하다 중단됐다, 이 건물을 소유하고 있는 대원전기 측에서 다른 용도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를 진행 중에 외벽을 헐다 보니 읍사무소 건물의 윤곽이 그대로 남아 있어 철거하기가 너무 아쉬워 옛 읍사무소 건물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하였다는 것이다.

어찌나 반갑던지 그 건물의 의미를 알아준 대표에게 연신 감사의 말을 전한 바 있다. 사실 이 읍사무소는 증평읍의 발전상을 그대로 나타내는 아주 상징적인 건물로 위치나 배치, 건축양식, 지역에서 차지하는 의미 등등이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충분해 이곳을 어떻게든 살려내든가 아니면 읍사무소로 다시 사용하든지 고민하던 중이었다. 어쨌든 가치를 제대로 인정하고 건물을 살려내는 방향으로의 결정은 그리 쉽지 않은 결정이기에 지금도 감사할 따름이다.

근현대의 문화유산이 하나하나 사라져가는 현 세태에 문화유산의 가치와 지역의 뿌리를 연결 짓는 일은 생각하기 쉽지 않은데 이런 훌륭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다행이다. 더욱이 취임 후 증평의 근현대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발굴해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근간이 되도록 하는 시책을 추진하고 있는 시점에 증평의 모습인 옛 증평읍사무소가 복원된다고 하니 벌써 마음이 훈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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