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규 제천시장

김창규 제천시장

[동양일보]나는 전직이 외교관이었던 관계로 여러 나라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다. 미국, 카자흐스탄, 영국, 독일, 러시아, 벨라루스, 키르기스스탄, 아제르바이잔의 순서로 살았으니 총 8개국에서 살았던 셈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내가 살아 본 나라 중 어느 나라를 가장 좋아하는지 묻는다. 나는 주로 영국과 키르기스스탄을 좋아한다고 대답한다.

영국과 키르기스스탄은 서로 공통점보다는 다른 점이 많은 나라들이다. 한 나라는 경제적으로 매우 잘 사는 나라이고 다른 나라는 그렇지 못한 나라이다. 한 나라는 민주주의의 본산이고 다른 나라는 민주주의가 시작 단계에 있는 신생국이다. 정치적으로 또 경제적으로 판이하게 처지가 서로 다른 두 나라를 내가 함께 좋아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나는 그 이유를 두 나라 사람들의 정직하고 착한 마음에서 찾는다. 정직하고 착한 사람들에겐 양심과 도덕이 있다. 영국에서는 교통사고가 발생하면 사고 당사자들이 사고 차량을 바로 노변으로 이동시킨 후, 전화번호와 이름을 서로 교환하고 헤어진다. 여간 큰 사고가 아니고는 사고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사고 차량을 현장에 그대로 두거나 경찰을 부르지 않는다. 우리와 같이 길 한가운데 차를 세워놓고 큰 소리로 다투지도 않는다. 사고 후에도 각자가 보험사에 사고 내용을 신고하면 그만이다. 영국인들이 사고 현장에서 이같이 쿨하게 행동하는 데는 서로의 정직성에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다른 예는 영국인들의 배려와 관계된 얘기이다. 영국은 우리나라의 회전교차로와 유사한 라운드어바웃(roundabout)이 많은 나라이다. 라운드어바웃은 우리나라 사람들과 같은 외국인들에게 생소하여 차례를 지켜 진입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어서 나도 진입하는데 여러 번 실수를 한 적이 있었다. 통상 먼저 진입한 차가 우선인데 그걸 모르고 진입하다 보면 자칫 큰 사고를 낼 수 있는 아찔한 순간을 맞게 되는데 그런 위험스러운 상황에서도 영국인들은 외국인인 나에게 따뜻한 미소로 배려하는 친절을 보여주었다. 큰 소리로 나의 실수를 질타할 수도 있건만, 나의 처지를 배려해 주는 이들의 속 깊은 배려에 감동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영국인들의 따뜻한 배려를 경험하면서 나도 남들에게서 받은 배려를 다른 이들에게 돌려주려고 노력했다(reciprocity). 말하자면, 배려의 선순환이다. 영국인의 친절과 배려는 내가 영국에서 행복했던 이유였고 내가 영국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내가 키르기스 사람들을 존경하고 좋아하는 이유는 그들이 정직하고 착하기 때문이다. 구소련 붕괴 이후 그 엄혹했던 시기에도 이들은 서로 보듬고 배려했다. 나에겐 지금도 잊지 못하는 키르기스에서의 귀한 인연이 있다. 한 분은 농업부장관이고 다른 한 분은 산업부장관이었는데 두 분이 나에게 보여준 정직하고 착한 모습은 나에게 큰 귀감이 되었고 당시 내가 대사로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기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농업부장관의 도움으로 주재국에 스마트온실농업을 성공적으로 소개할 수 있었고 산업부장관의 도움으로 우리 기업의 애로를 원만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들은 남을 속일 줄 모르고 양심에 따라 살았다. 행동과 언어에는 절제가 있었고 품위가 있었다. 공직자로서 최소한의 염치가 있었고 사회에 대한 진정한 헌신이 있었다.

정직하고 착한 사람들은 타인을 배려할 줄 안다. 자기만 잘 살겠다고 양심과 도덕을 내팽개친 채 악다구니하는 사회는 잘못된 사회다. 배려하고 헌신하는 마음은 여간한 정직과 착함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경제적 풍요보다는 마음의 풍요가 우리를 더 행복하게 한다. 특히, 경제적 풍요를 어느 정도 이루고 난 다음에 진정으로 행복한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마음의 풍요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우리는 정직성이나 도덕성 측면에서 지금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의 사회신뢰지수는 낮고 행복지수도 낮다. 2023년도 우리나라의 사회신뢰지수(레가툼(Lagatum) 세계번영지수)는 167개국 중 107위이고 행복지수는 38개 OECD 국가 중 35위다. 부끄럽다. 경제적으로는 어느 정도 풍요를 이루었는데 우리가 이런 부끄러운 처지에 몰린 것은 우리 사회가 정직하고 착한 마음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정치인부터가 부정직하고 착하지 않다. 정치인은 도덕군자는 못되어도 언행에 절제가 있고 품위가 있어야 한다. 막스 베버의 말대로 정치인의 최소한의 덕목은 정직과 염치이다. 파렴치가 지배하는 나라는 민주주의고 자본주의고 다 엉망이 되고 만다. 사회신뢰지수도 하락하고 행복지수도 추락한다. 잘 사는 나라, 남의 존경을 받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스스로 정직하고 착하게 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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