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경재 충북경제자유구역청장

맹경재 충북경제자유구역청장

[동양일보]딸은 요즘 아이들이 크니 우유를 많이 먹는다고 투덜거린다. 경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지출이 많아진다는 소리이다. 딸의 이야기에서 눈물을 삼키며 신문을 돌리던 나의 청년 시절이 떠오른다.

집안에서는 중학교 졸업할 무렵, 나의 인생길을 정해주었다. 금왕의 무극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다니며 면서기가 될 준비를 하란다. 그 시절에는 면서기를 하려면, 농업고등학교에 가야지 가능성이 있다고 어른들은 판단한 것이다. 인문계를 갈 실력임에도 농업고등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집안에선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공무원의 꿈을 품고 청주에 자리한 농업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느 날인가. 자취방에서 인문계를 다니는 작은형과 큰형님이 크게 다투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작은형은 ‘경재를 왜 농고에 보냈느냐.’고 항의하고, 큰형은 ‘경재를 대학에 보낼 형편이 안 되어 농고를 다니며 공무원을 준비해야 살 수 있다’며, 나의 진로를 두고 형들이 다투는 거였다. 결론은 큰형의 승리로 끝났다. 그때 나의 심정은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가난으로 겪는 설움이었다.

가난의 설움은 집안의 대들보인 가장이 없다는 증거였다. 아버지의 부재로 경제적인 어려움은 날로 심해졌다. 재산도 기술도 없는 어머니가 홀로 육 남매를 먹이고 학교를 보내야만 하는 현실은 참으로 가혹했다. 어머니의 직업은 밤낮 틈새로 밭농사를 짓고 낮에는 시장에서 옷을 떼어 벽지로 팔러 다니셨다. 깡촌에서 태어난 내가 손에 쥔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태어날 때처럼 빈손이었다. 지긋지긋한 가난과 깡촌을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다.

내가 머무는 깡촌은 누가 안내하기 전에는 접근하기도 어려운 지역이었다. 집 앞에는 강물이 흐르고 들판은 보이지 않으며, 집 뒤에는 산이 산을 엎는 깊은 골짜기가 이어졌다. 읍내를 가려면 적어도 삼십 리를 걸어야 했고, 면사무소도 고개를 여러 개 넘어야 겨우 찾아갈 수 있었다. 동네에 아이가 태어나 출생 신고를 하려면, 새벽부터 서둘러 면사무소를 찾아가야만 했다. 오전 내내 산길을 걸어 면사무소에 도착하면, 점심시간이다. 점심을 먹으러 나간 면서기를 기다려야 하고, 미리 온 사람들이 줄을 서서 또 기다려야 하니 정녕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리 출생 신고를 마치고도 며칠을 기다려야만, 겨우 호적부에 이름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정도였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신아일보라는 지역 신문사가 있었다. 새벽에 학비를 보태고자 신문을 돌리기로 했다. 내가 맡은 구역은 우암동과 내덕동 지역에 신문 약 150부 정도를 배포하는 거였다. 우암동 주택지역에서 한번은 신문을 넣고 난 후에 비가 내려 신문이 모두 젖은 일이 있었다. 다음날 신문을 넣고 가려는데 대문이 열리더니 주인이 나를 보자는 것이었다. 어제 신문이 비에 젖어 못 봤다는 것이다. 앞으로 ‘신문을 젖지 않도록 배달하라’는 말과 ‘신문을 너무 늦게 넣는다’며 한참을 나를 붙들고 혼을 내는 거였다. 나는 서러움에 고개를 숙인 두 눈에서 한동안 눈물이 멈추지 않고 흘렀다.

주인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여러 번 주억거리고, 신문 돌리는 동선을 수정하겠다고 했다. 그 집에 제일 먼저 신문을 돌리기로 하니 시간이 더 소요됐다. 다시 혼나지 않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그 집에는 신문을 던지지 않고 문 밑으로 밀어 신문이 다소곳이 펼쳐지도록 정성을 다했다. 대부분 시간이 촉박해 신문을 대문 간에 휙 던져놓는다. 그래야만 150부를 두 시간 안에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혼이 나는 일이 어디 그뿐이랴. 지국장이 신문을 확장하라고 해, 신문을 보지 않는 집에 넣었다가 혼나는 일도 다반사였다. 신문을 주인이 아닌 다른 사람이 집어 가서 신문을 보지 못했다고 항의하여 혼나는 사례도 종종 있었다.

세파가 어찌 차갑기만 하랴. 일주일 후에 신문 건으로 나를 크게 혼을 낸 주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지레짐작으로 무얼 잘못했을까 봐 겁이 더럭 났다. 그런데 주인은 지난번 내가 혼을 많이 내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리고 ‘혼자 지내느냐’고 물어 ‘작은형과 함께 지낸다’고 하니 우유를 주셨다. 순간, 왈칵 눈물이 쏟아지는 게 아닌가. 우유를 안 받겠다고 사양하니 극구 손안에 쥐여 주었다. 우유를 받아오며 일전에 불편했던 감정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더욱이 다음 날은 대문 앞에 우유가 두 개 놓여 있었다. 작은형의 우유까지 챙겨주는 주인의 깊은 배려에 가슴이 뭉클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딸이 두 아이를 키우며 우윳값이 비싸다고, 한 번에 여러 개를 못 샀다고 투덜대는 데 건성으로 들린다. 사십여 년 전, 우유로 이어진 훈훈한 기억이 떠올라서다. 신문을 돌리는 일에도 정성과 배려가 필요하다. 내가 돌리는 신문을 기다리는 독자들을 생각해 주인의 마음과 시간을 잘 체크해야 한다. 신문을 돌리며 사람들의 성향과 세상 물정도 알게 됐다. 무엇보다 세상에는 타인의 마음을 살피고 배려하는 가슴 따스한 분이 많다는 사실도 알았다.

책만 읽는 바보, 조선 지식인 이덕무는 “가장 빛나는 것들은 언제나 일상에 있다.”라고 적는다. ‘우유’를 떠올리면, 지금도 눈물을 삼키며 보내던 청년 시절이 기억난다. 돌아보니 그날도 나의 가장 빛나던 일상이다. 가난으로 서글픈 시절이지만, 내가 강인한 성품으로 자라도록 자양분이 된 날이기도 하다. 그날 나를 따뜻하게 보듬어주신 그분이 떠올라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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