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기황 시인

나기황 시인

[동양일보]선거철이다. 22대 국회의원 300명을 뽑는 총선이 4월 10일로 다가왔다. 공천의 스톱워치가 째깍거리는 가운데 복잡한 물밑 셈법에 후보자들은 물론 정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덩달아 어수선하다. 당이 쪼개지고, 새로 생겨나고, 합종연행(合從連行)의 조짐도 보인다. ‘야당 대표 피습’ 같은, 전에 없던 사건이 불쑥불쑥 터지는 것을 보면 정치판의 뒷걸음질이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필자는 본지 칼럼을 통해서 정치 얘기는 하지 않겠노라 밝힌 바 있다. 그러나 2월에 몰려있는 동네 선거 이야기는 잠시 짚고 넘어가고 싶다. 대부분 회사나 단체의 정기총회가 이달에 열리고 소위 ‘동네 선거’라고 하는 새마을금고나 신협에서 임원선거를 하는 곳이 많다.

나랏일 하는 사람들의 큰 정치판이야 그렇다 치자, 하지만 신협처럼 조합원이 직접 투표를 해서 임원을 선출하는 곳도 국회의원 선거 못지않게 요란하다. 전형위원회가 구성되고 선거관리위원회가 열린다. 칠팔천 명의 선거인 명부가 작성되고 총회 당일 이들 중 상당수가 투표장에 나와 투표를 한다. 일단 선거가 있는 해는, 후보자 등록 훨씬 전부터 이번에 ‘누가 나오고 누구랑 붙는다’가 한 다리 걸치면 금방 알 수 있어서, 진즉부터 후보자 간 신규 조합원 가입부터 치열한 경쟁을 해왔다고 보면 된다.

그러다 보니, 호형호제하며 잘 지내던 조합원끼리도 묘한 냉기류가 흐른다. 잘 가던 단골 식당도 어느 한쪽에서 피하게 되고, 상대 후보의 등만 봐도 가던 걸음을 늦추는 웃지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이때부터 기존 정치판, 기존 선거판에서 벌어지는 양상이 동네 선거에서도 똑같이 연출된다. 어쩜 그렇게 판박이일까, 선거에 반응하는 어떤 묘한 DNA가 있어 대물림하는 걸까. 아니면, 사람들을 선거판으로 끌어모아 혼탁하게 만드는 일종의 선거 바이러스가 작용하기 때문일까.

‘정치는 양보와 협상의 예술이다.’, ‘정치는 불확실성의 예술이다.’, 정치가 예술이라고?, 동의한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니까. 그러나 선거로 넘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선거는 권력 교체를 위한 도구다.’라는 윌리엄 E. 시먼스의 말이 훨씬 직설적이고 설득력이 있다. 선거는 뽑는다, 가려낸다, 바꾼다고 하는 것이 기본으로 깔려있다. 선거는 파트너가 있는 ‘행위예술’이자 싸워서 이겨야 하는 전쟁이다. 말끝마다 ‘무조건’이 붙는 이유다. ‘무조건 이기고 봐야 한다.’라는 게 선거판의 기본 정서며 진리다. 어떤 선거든 선거판이 벌어지면, 숨어있던 선거 바이러스가 준동한다. ‘무조건’을 장착한 선거 바이러스는 피아(彼我)의 구별도 없다. 상황에 따라 수시로 바뀌는 변종 바이러스를 생성해 낸다.

‘무조건’이라는 비논리적이고 무지막지한 단어를 장착하고 선거판을 흔들어 놓는다.

‘제삼자’가 돼서 한발 물러서 보면, 이사장 자리도 아닌 봉사직에 불과한 이사, 감사 자리까지 저리 집요하게 몰입할까 생각하지만, 이미 선거 바이러스에 감염된 후보자들은 관성에 의해 악성종양인 암(癌)-‘고치기 어려운 나쁜 폐단’ 쪽으로 치닫게 된다. 후보자들은 이겨야겠다는 일념 때문에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다. 욕심만 탱탱하게 부풀어 올라, 상대를 공격하는데 에너지를 다 써 버리고, 정작 자신은 불안하고 공허해서 순간순간 좌절과 환희를 오가는 조울증 환자가 되고 만다.

일상에서도 ‘무조건’은 참 무서운 말이다. ‘대화와 협상’, ‘공정과 정의’와는 거리가 있는 말이다. 과정을 생략한 결과 위주의 일방적 선언이다. 선거가 과열되고 혼탁해질수록, 선거가 끝난 후에도 갈등을 봉합하는 데 애를 먹는다. 이기고 보자는 선거 바이러스가 상대를 공격하는 창이 되기도 했고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무기 역할도 해왔기 때문이다. 4월 총선에서도 ’무조건‘이기고 보자는 악성 바이러스를 경계할 필요가 있음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