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순 수필가

임정순 수필가

[동양일보]오랜만에 장롱문을 열었다. 영하 15도 이상으로 떨어질 거라는 뉴스에 몸이 먼저 떨고 있다. 아무리 난방에 신경을 쓰고 바람구멍을 뽁뽁이로 막아 본들 주택은 더 춥다.

지난해에 그토록 껴안고 버리질 못하던 옷가지를 떠나보냈다. 그 옷들만 입으면 허리가 꼿꼿해지고 허리선이 잘록했다. 소위 말하는 메이커 정장들이다. 한때 잘난 척하고 꽃 같았던 젊은 시절의 흔적을 가끔씩 꺼내 봤지만, 그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데도 시간이 필요했다.

장롱 안은 텅 비었다. 저 안쪽에 검은 비닐 봉지가 눈에 띄어 꺼내 보니 보라색 내복 바지다. 기모가 들어가 폭닥하니 두툼하다. 친정어머니가 오래전에 사준 것을 장롱 속에 쑤셔 넣었다. 분명 입지 않을 셈으로 몇 번이나 들었다 놨다 했다.

그런데 왜 오늘은 쉬 놓지 못할까. 분명 어머니도 아신 거다. 나이 먹으면 몸에서 찬 바람이 살품으로 파고든다는 사실을. 정말 그렇다. 내복을 입어도 따뜻하지 않고, 온돌 침대 온도를 높여도 뜨겁지 않으니 요상하다.

젊을 때야 몸에서 열이 나니 두꺼운 옷을 피하고, 추위를 참으면서까지 몸매를 살려주는 얇은 옷을 입는다. 한데 나이 먹으면 밥심이 아니라 옷심이 있다는 말도 있다. 올겨울만 해도 기모가 들어 있는 꽃바지를 입는다. 우선은 가볍고 따뜻하다. 60 넘으면 비싼 옷 입어 봐야 평준화란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만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팔순이 넘은 엄니는 요양원에 계시면서 누구한테 부탁했을까. 자식들이 주는 용돈을 쓸데없는 것 샀다고 핀잔을 준 생각이 떠오른다. 좋아하지도 고마워하지도 않고 장롱 속에 숨겼다. 오늘 그 마음을 들킨 거다. ‘엄마 ~~ 미안해요. 무릎도 시리고 허리가 시린 날이 올 줄 몰랐어요.’ 가슴에 끌어안으니 ‘괜찮다~괜찮아~~’라는 말이 들리는듯하다.

외할머니는 손녀딸한테 반짇고리에 굵은 실, 가는 실을 종류대로 패에 감고, 바늘도 종류대로 찔리지 말라고 손수 골무도 만들어 주셨다. 어쩌다 반짇고리를 열면 ‘살다 보면 살아진다’라는 할머니의 속 깊은 사랑 위에 그리움이 절절히 피어오른다. 어머닌 몸에서 찬 바람이 일 줄 알고, 움츠리지 말고 입으라며 내복을 생각하시곤 따스한 미소도 지으셨을 것 같다. 내 새끼만큼만은 살과 뼈를 다 먹이고 죽는 가시고기와 뭐가 다를까. 바람마저도 막아 주고 싶을 뿐 아니라, 목숨도 아깝지 않은 것은 분명 모성 본능이다.

엽엽하셨던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나는 딸에게 무얼 해 줄까? 이불을 꿰맬 바늘은 달갑지 않을 테고 내복은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고 아무리 좋은 말을 해 준들, 힘들고 외로울 때 떠 오르는 어떤 말에 힘을 얻을까. 그저 세상으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는 사람이 되라고 기도하면 될까.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둘러봐도 줄 만한 값진 게 없다. 끌어안고 있는 많은 책은 나만 좋으니 가질 리 만무다.

할머니 반짇고리는 어쩌다 한 번만 써도 할머니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져 그리 소중할 수가 없고, 어머니의 내복은 찬바람을 한방에 막아 주고 잘 살아 내라고 다독인다. 딸은 먼 훗날 그리움이 사무칠 때 가끔씩 꺼내 보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얼까 진지하게 고민해보자.

내복을 허리춤까지 끌어 올린다. 동장군이 와도 끄떡없다. 내년에도 후년에도 계속 입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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