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룡사 대들보로 충주 수비청 세워....지정문화재 다층청석탑 돋보여
일능 주지스님 ”사찰은 인간사 번뇌와 어려움 털어내고 마음 편안해지는 곳“

창룡사 전경
창룡사 전경

 

[동양일보 윤규상 기자]충주 직동 금봉산 중턱에 자리 잡은 창룡사(蒼龍寺·충북 충주시 고든골길 63-89)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알려져 있다.

천년고찰로 잘 알려진 창룡사 기원은 고승 원효대사(元曉大師)가 충주 고을을 지나며 한 객주에 머물며 여의주를 물고가는 꾼 꿈으로부터 시작한다.

원효대사는 여의주를 문 푸른 용을 따라가 관세음보살로부터 꿀맛과 같은 물을 얻어 마신 꿈을 깬 뒤 현몽(現夢)인 줄 알고 신기로움에 실지를 찾아 나섰다가 지금의 절터에 이르러 꿈과 같음을 깨닫고 계기로 그 자리에 절을 세웠다는 속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창룡사 역사는 신라 문무왕 때 고승 원효가 창건했고,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懶翁和尙)이 중건했으며 조선 선조 때 서산대사가 낡은 건축물을 손질하고 고쳐 큰절의 면모를 갖췄다고 한다.

그러나 1870년(고종 7)에 당시 목사 조병로(趙秉老)가 현재 충주 성서동 옛 세무서 자리에 외부 침략과 공격을 지켜 막기 위한 수비청(守備廳)을 세우기 위하여 불전(佛殿)을 철거해 규모가 심하게 축소됐다고 전해진다.

충주 시내 중심가에 들어선 관아골 일원에 당시 창룡사 대들보를 뜯어다가 수비청을 세웠다는 기록도 남아있을 정도로 대찰(大刹)의 위세를 엿볼 수 있다.

창룡사 극락보전 앞마당에 자리한 다층청석탑(多層靑石塔)
창룡사 극락보전 앞마당에 자리한 다층청석탑(多層靑石塔)

 

수비청을 짓는 데 쓰인 자재는 그 뒤 창룡사 주지 김추월(金秋月)이 다시 뜯어다가 충주 사직산 인근 지현동에 자리한 대원사(大圓寺)를 짓는 데 사용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1905년에는 여신도 박씨로 알려진 신도가 법당을 신축했으며, 1913년 후불탱화를 봉안하고 불상에 다시 금칠해 중흥을 도모했다고 한다.

1951년 주지 동인(東寅)이 중건하고, 1975년 주지 도관(道觀)이 중창한 뒤 1993년 정도(靜道) 스님이 과거 대웅전을 해체하고 극락보전을 짓고 칠성각을 철거한 뒤 산신각을 지었다고 한다.

창룡사 주지를 지낸 정도 스님은 현재 대한불교조계종 5교구 본사 법주사 주지로 재직 중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명당자리로 알려진 창룡사는 전국 각지에서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부처님 불심(佛心)을 전해 받기 위해 신도들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봄철은 새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리고, 가을은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만 들릴 뿐이라는 조용한 사찰로 잘 알려진 창룡사는 겨울철은 나무 위 눈 날리는 소리만 들린다는 게 신도들 사이에서 알음알음 전해지고 있다.

창룡사는 조선 시대까지 두 차례에 걸쳐 중건된 뒤 오랜 기간 1988년 전통사찰로 지정됐다.

극락보전 내부는 아미타삼존상이 봉안돼 있고, 관음보살좌상은 1730년(영조 6)에 만든 불상이다.

2006년 충북도 문화재자료 56호로 지정된 창룡사 다층청석탑(多層靑石塔)도 앞마당에 있다.

극락보전 앞마당에 자리한 다층청석탑은 지정문화재로 화강암 기단 위에 탑을 올린 형태다.

탑신은 없고 지붕돌만 남아있으며, 1층 지붕돌 석재 밑에 연꽃잎이 위로 향한 무늬가 새겨져 있다.

탑이 심하게 망가져 온전치 않지만, 지붕돌 받침과 연화문 조각 등을 통해 고려 때 조성된 것으로 여겨져 창룡사가 고려 때 창건한 절임을 증명하고 있다.

탑 외부가 짙은 청색을 띠고 있어 청석탑으로도 불리고 있다.

대한불교조계종 5교구 본사인 법주사(法住寺) 말사인 창룡사는 현존하는 당우(堂宇·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극락보전과 산신각, 요사채 등으로 구성돼 있다.

창룡사 일능 주지스님
창룡사 일능 주지스님

 

주지 일능 스님은 ”천년고찰 창룡사를 찾아 조용하고 고요한 시간을 즐기며 마음과 영혼을 안정시키고 깊은 평온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며 ”사찰은 인간사 번뇌와 어려움을 털어내고 마음이 편안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충주 윤규상 기자 yks0625@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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