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포석조명희문학관 문학박사

강찬모 포석조명희문학관 문학박사

[동양일보]2024, 갑진년(甲辰年) 새해가 밝은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새해에 떠오르는 일출을 바라보면서 저마다의 간절한 소망 한 가지씩은 빌었을 것이다. 이 소망 중에 건강과 재물 그리고 사회적 성공이 맨 앞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것이 인지상정이니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올 한해 만나게 될 좋은 인연을 소망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삶이란 사람과 사람이 실타래처럼 얽히고설키며 끊임없이 만나고 헤어지는 ‘장시(場市)’의 풍경이 아닌가.

한국 근대문학과 예술에서 이러한 향기로운 인연으로 삶을 훈훈하게 만든 사람들이 있다. 포석(1894~1938)과 최인훈(1936~2018), 이어령(1934~2022)과 김시현(1971~)이다. 우선 포석과 최인훈의 인연이 특별한 무게를 더한다. 포석의 삶과 문학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면류관처럼 따라붙는 한국 근대문학의 여명을 밝힌 1세대의 상징적 작가다. 최초의 희곡집(‘김영일의 사’)과 최초의 미발표 개인 창작 시집(‘봄 잔디밭 위에’), 프로문학의 기념비적인 소설(‘낙동강’) 발표 그리고 소련(연해주)으로 망명(1928)한 다음 최초의 ‘망명 문단 결성’과 ‘망명 문예지’ 출간 등은 그의 쇄빙선(碎氷船) 같은 선구자의 길을 증명한다. 1928년 결행한 망명도 일제 강점기 한국 작가로는 첫 망명길이었다.

“60년도는 정치적으로 4.19의 해였다면 문학사적으로는 ‘광장’의 해였다”고 말한 평론가 김현의 말처럼 최인훈은 소설 ‘광장’에서 그동안 금기였던 ‘민족’과 ‘통일’의 문제를 역사와 현실로 견인했다. 그는 타계(2018)할 때까지 평생 민족과 이념의 문제에 천착한 한국 현대문학의 거목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해방 후 최인훈이 다닌 원산고등학교 1학년 문학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낙동강’은 북한의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어 있었다. 최인훈은 문학 숙제로 ‘낙동강’ 독후감을 써 발표해 작문 선생님으로부터 “앞으로 훌륭한 작가가 될 것”이라는 치명적인 예언을 듣고 월남한 뒤에 실제로 대작가가 되었다. 최인훈은 평생 포석의 삶과 문학을 ‘사숙(私淑)’하면서 흠모했다. ‘광장’ 이후 최고의 걸작인 ‘화두’(1994)는 포석의 삶과 문학을 모티프로 쓴 소설로 포석에 대한 최인훈의 향심(向心)의 결정체며 포석에게 바치는 헌사의 작품 즉 ‘오마주(hommage)’의 성격을 갖는다. 그만큼 두 사람의 인연은 역사와 시대적으로 깊은 근원이 있다.

이어령과 김시현의 인연도 흐뭇한 아름다움으로 채색되어 있다. 이어령은 설명이 필요 없는 도저(到底)한 지성이며 르네상스한 석학이었다. 약관(22세)의 나이로 타성에 젖은 기성을 난타(‘우상의 파괴’,1956)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이래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체성을 그 특유의 깊은 통찰력으로 명쾌하게 진단한 바 있다.

김시현은 진천 출신으로 우리의 실용적인 전통 생활 문화인 ‘보자기’를 오브제(objet)로 활용해 새로움을 추구하는 28년 경력의 한국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화가) 중 한 사람이다. 주로 궁중이나 사대부가에서 사용한 화려하면서도 사치스럽지 않은 보자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지난 16년 동안 꾸준히 이어왔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한 편의 영화처럼 극적인 휴머니즘을 배경으로 한다. 김시현이 대학원 시절 본격 미술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고 있을 무렵 스승(대학원, 대학)으로부터 “멀리서 찾지 말고 발아래에서 찾아라”는 말과 함께 전해 받은 책이 ‘이어령의 우리 문화 박물지’(2007)다. 책을 펼치면 유전적으로 한국인의 생활 문화 속에 깊이 내재된 우리의 정체성이 담긴 63개의 전통적인 유무형의 물건과 정신적 가치들을 만날 수 있다. 김시현은 이 책 속에서 ‘보자기’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그동안 애타게 찾고 있던 자신이 가야 할 예술의 길과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된다. 그 후 김시현은 일관된 작업으로 ‘보자기 작가’란 독보적 명성과 더불어 숱한 천재가 시시로 명멸하는 한국 현대미술의 거친 생태계에서 주목받는 여성 작가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때 생각하지 않았던 반전이 일어난다. ‘이어령의 보자기 인문학’의 책에 김시현의 보자기가 표제 그림으로 실리게 된 것이다.

이어령의 책에서 영감을 얻어 비약(飛躍)한 김시현에게 이번에는 반대로 천하의 이어령이 김시현의 보자기 그림을 자신의 책 표지 그림으로 요청했던 것이다. 이러한 특별한 스토리와 장면 자체가 사랑과 정성을 담아 주고받는 보자기의 따뜻한 이미지와 너무도 닮았다. 참으로 아름다운 인연이다. 예부터 이런 인연을 ‘가연(佳緣)’이라고 했다. 이렇게 포석과 최인훈, 이어령과 김시현은 생전에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그러한 아쉬움이 오히려 서로의 작품과 글을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는 여운으로 남아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는 듯하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는데 이들 네 사람의 인연이 참 부럽다. 그러나 필자는 행복하다. 그들의 인연이 이 풍진(風塵)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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