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곧 설을 맞는다. 차례를 모시고 세배를 올린 후에 떡국을 나누면서 덕담을 주고받는 설날 풍경은 점차 사라지고 있고, 연휴를 활용해 국내외로 가족여행을 떠나거나 아예 혼자서 지내는 사람들의 비중은 높아지고 있다. 무엇이 내게 더 이익이 되는지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는 경제적 합리성에 비추어 보면 이해할 만한 일이다. 공동체로서 대가족이 해체되어 버린 상황에서 명절에만 겨우 만나는 일가친척들이 내 삶에 섣부른 평가나 충고를 해올 때 감내해야 하는 불편과 불쾌를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설과 추석은 달의 움직임을 전제로 성립한 오랜 명절의 상징이다. 21세기를 20년 이상 보낸 지금도 귀경길이나 귀성길 정체가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전통의 생명력을 과소평가할 수만은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다른 한편 나 자신의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관계를 설정하는 데 익숙해져가는 젊은 세대는 물론, 그들과 함께 살아야 하는 기성세대에게서도 이런 전통 명절이 지니는 의미나 위상이 지속적으로 약화되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가정의 분위기나 문화 차이 등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전반적으로 전통 명절이 약화되는 현상은 막을 수 없는 대세가 된 듯하다.

그럼 설명절로 상징되는 전통을 지금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답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바로 그 전통이라는 것이 지금 나에게 또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일이다. 만약 지금 나와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전통이라면 마땅히 극복하는 방향으로 함께 힘을 모아가야 할 것이다.

전통(傳統, tradition)은 과거에서 오늘로 전해오는 것이라는 뜻과 함께, 그것 중에서 오늘날에도 통용될 수 있는 가치가 담긴 것이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오늘날 더 이상 통용되기 어려운 것은 인습(因習)이라고 구별지어 부르는 걸 보면, 전통은 과거에서 내려온 것 중에서 상당한 수준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당성은 각 개인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급속한 변화의 와중에 있는 우리 한국인들과 한국사회에서는 지속적인 재평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할 듯하다.

이렇게 전통에 대한 재평가를 하면서 우리가 꼭 생각해 보아야 하는 지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신의 이해관계라는 판단 기준에 대한 성찰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들’에 대한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의 필요성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으라는 명령을 내리는 자본주의 기반의 시민사회에서 자신의 이해관계는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일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 자기에게 더 이익이 되고 덜 손해가 되는 선택을 하는 일은 생존을 위한 기본요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런 요건을 충족하기 위한 이기성과 함께, 다른 사람의 행복과 고통에 공감하고 협력하는 본성도 갖추어져 있음이 뇌과학의 성과로 지속적으로 확인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살다 보면 다른 사람에게서 소외되는 것은 물론이고, 문득 스스로도 용납하기 어려운 난처한 상황과 마주하게 된다.

두 번째로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일은 ‘지금의 나를 이루는 것들’에 대한 공정하고도 객관적인 평가 노력이다, 우리는 태어나서 누군가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비로소 살아남을 수 있고,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인간사회에서 자라나야만 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거나 늑대인간 같은 비정상적인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내가 자라난 사회는 역사와 문화의 토대 위에서 정착했고, 그 역사와 문화가 일정한 검증 과정을 거쳐 오늘에 살아남은 것이 바로 전통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일정 부분 전통의존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디. 물론 이 전통은 살아있는 것이어서 지속적인 비판적 계승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다른 쪽으로는 세계시민으로서의 보편적인 정체성에 열려 있을 때라야 비로소 그 온전한 의미를 보장받을 수 있다. 우리가 함께 보내고 맞은 20세기는 식민지와 전쟁, 급속한 산업화와 민주화 등으로 이 전통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던 시대였다. 이제 최소한 외형적으로는 부러울 것 없는 조건을 갖추게 된 21세기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2024년 설날을 맞으며 내 안의 전통과 우리 사회의 현실에 정당한 눈길을 보내는 시간을 누군가와 함께 나누고 싶어진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