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우 시인(문학평론가)

이석우 시인(문학평론가)

[동양일보]일본이 신라를 침입한 것은 문헌상으로는 기원전 50년 경이다. 혁거세 8년에는 왜 군사가 변경을 침범하려다‘시조에게는 하늘에서 내려 준 덕이 있다.’라는 말을 듣고 스스로 물러났다는 이야기가 그 시작이다. 14년에는 왜병선 100여 척이 민가를 약탈했다더니, 또한 다른 기사는 왜병이 금성을 열흘간 포위했다가 식량이 떨어지자 돌아가는데, 왕이 수천여 명의 기병으로 추격하여 독산 동쪽에서 싸움을 벌였으나 패하여 죽은 병졸이 절반이 넘었다고 하였다. 적들은 말을 버리고 산으로 올라간 왕을 여러 겹으로 포위하는데 이때 갑자기 어두운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별할 수 없게 되니, 왜병은‘적은 하늘이 왕을 돕는다.’라고 생각하여 물러났다고 삼국사기는 기록한다.

백제와 신라가 동맹이었고 백제와 왜국이 동맹인데도 왜구는 신라 해안을 끊임없이 노략질했다. 신라는 왜구의 침략을 견디지 못하여 414년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왜구대궤 倭寇大潰”라는 기록이 그 증좌다. 이는‘왜구를 크게 궤멸시켰다’라는 의미이다. 고구려는 신라로 쫓아 들어가 가야지역으로 달아나는 왜구를 멸하였다. 신라는 고구려가 왜구를 퇴치해준 댓가를 톡톡히 감내해야 하였다. 몇십 년 동안 속국의 신세를 면치 못한 것이다.

왜구(倭寇)라는 뜻은‘왜가 도둑질한다’라는 뜻이다. 왜구는 고려말, 조선초에 가장 심했고, 특히 고려 말 약 40년간은 극도로 악랄해져 고려 멸망의 요인을 제공한다.

일본어로는 와코(わこう)라고 하여, 도적의 상징으로 비하하여 부르면서도 일본인 학자 중에는 처음에 대부분 일본인이었으나, 왜구가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해적 집단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실제‘왜구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규슈 일대 중소, 지방 다이묘의 지휘를 받고 움직인 일종의 군사, 사략 집단’이었으며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고려인이나 조선인의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였다. 왜구는 흔한 해적이 아니라 나중에는 왜 조정에서 파견하는 정규군 수준으로 성격이 변모해 버렸다. 왜구는 규슈 일대의 일본인들로서, 주요 근거지는 대마도·마쓰우라〔松浦〕·이키〔壹岐〕등이 활동 무대였다.

일본 기록에 신라 군사가 오사카에서 1백리 떨어져 있는 명석포에 쳐들어왔다고 되어 있다. 적간관(赤間關) 동쪽에 한 구릉이 있는데 왜인들은 이것을‘백마분’이라 부른다. 신라 군사가 일본에 깊이 쳐들어오니 일본이 화친을 애걸하고 군사를 풀어주기를 청하여, 백마를 죽여서 맹세한 뒤에 말을 이곳에 묻었다는 얘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렇게 오히려 통일신라 때는 큐슈의 왜구를 직접 쳐들어가 척결할 때도 있었다.

고려 1223년(고종 10)에 왜구가 김해에 침입했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등장하는데, 이때 고려 정부는 일본에 사신을 보내 왜구의 통제를 당부하여 노략질을 진정시킨다. 이렇게 고려와 일본 정부는 외교적으로 양국 간의 마찰을 해결하는 비교적 완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는 일본에게 항복을 권하러 간 원과 고려의 사신단 중에서 고려의 사신을 살려준 예에서도 엿볼 수 있는 일이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본격적으로 침입하기 시작한 것은 1350년부터였다. 충정왕은 그해 진도에 사람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공도화 하였다. 그리고 남해도는 공민왕대에 마찬가지로 공도화 한다. 섬을 비우니 왜구의 은신처로 십상이다.

동해·서해·남해의 연안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왜구가 침범하였다. 개경 입구인 강화의 교동과 예성강 어구 충주, 단양까지 출몰하였다. 고려는 왜구 때문에 천도를 고려하기도 했다. 우왕 때는 재위 14년 동안 378회의 침입을 받았다. 고려는 국호를 내리고 말았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