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 논설위원/소설가

박희팔 논설위원/소설가

[동양일보]지금은 정김말이 금왕면이다. 그때(1951년)는 생극면이었다 생극의 제일 끝 동네다. 그래서 꼬마들이 자동차가 생극 쪽으로 지나갈 때면, ‘생극 꼬바리 달린다.’ 고 했다. 생극의 제일 끄트머리에 있는 즉 꼬리에 있는, ‘바리’ 는 자동차를 그렇게 불렀다. 곧 ‘생극 꼬바리 달린다.’ 하면, ‘생극의 꼬리에 있는 정김말을 지나 자동차가 달려간다.’ 는 말이다. 우리 꼬마들은 트럭이든, 승용차든 지나가기만 하면 ‘생극 꼬바리 달린다.’고 크게 합창을 했다. 이 소리는 다른 동네서 들어온 애가 제일 처음 그렇게 외치던 것을 은 동네 애들이 따라서 노래처럼 자동차만 지나가면 합창했던 거다. 이 정김말에서 가는골이 보이는 외곽인 길에 나생이(냉이)가 많이 나 있다는 엄마의 말에 나 홀로 냄비를 들고 그곳에 갔다. 엄마가 끓여준 나생이 찌개와 나생이 국이 생각나서였다. 엄마 말따나 나생이가 길에 풀처럼 많이도 나 있다. 한참 그것을 냄비에 뜯어 담으면서 엄마 생각을 했다. 이 나생이가 얼마나 탐이 났으면 얘기 했을까? 그러나 엄만 앉은뱅이 자방침으로 남의 집 삯바느질을 하기에 여념이 없을 거였다. 그 좋은 나생이를 딸인 짠누이가 아닌 나에게 슬쩍 얘기했을 때는 내가 그만큼 나생이 찌개나 국을 좋아한 것을 아셨을 거였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열심히 뜯었다. 그런데 그것을 창연이 아버지인 성동양반이 보곤, “참 많이도 뜯었네. 하여튼 사내가 나싱개를 다 뜯고 신통두 해라.” 그 바람에 창연네 몫까지 뜯느라 해가 저물도록 뜯었다. 어두우니 하늘에 달이 떠 있었다. 그걸 보고 난 흥얼거렸다.

‘어젯밤에 나는요 거북선 타고,

저 밝은 달나라로 구경 갔지요.

계수나무 울밑에선 하얀 토끼가

쿵덕쿵덕 떡방아를 찧고 있어요.

가사가 맞을지는 모른다. 서울 있을 때 학교에서 부르던 노래다. 달나라엔 토끼두마리가 절구를 가운데 두고 마주 서서 절구 공이로 찰떡을 만들 거였다. 먹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 늦었지만 냉이 국으로 창연네와 우리 식구가 포식을 했다. 엄마는 냉이 국을 끓이면서 말했다. “내가 할 일을 사내인 네가 대신 하네.” “끓이는 게 제일이지 뜯는 게 뭐가….” 하고 얼버무렸다. 정말로 엄마는 냉이 국을 끓이는데 일가견이 있었다. 엄마는 그 바쁜 중에도 내가 뜯어온 냉이를 보고, “내가 어제 본 것을 정말로 뜯었네, 신통두 해라. 봐라 냉이 국은 이렇게 먼저 깨끗이 씻는 거야. 그리고 이렇게 된장을 풀어서 끓이는 거야 알았지!” 하는 거였다. 다른 양념이 안 들어갔는데도 그 냉이 국은 굉장히 맛이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냉이를 뜯어서는 내가 끓여보았다. 엄마가 말한 대로 그렇게 해보았지만 영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바쁜 줄 알고 어린 네가 대신 끓였구나. 잘 끓였네. 맛 좋다.” 하고 그릇을 싹 비웠다. 그러나 큰언니와 짠누나 동생은 “엄마가 끓인 것 하고 달라.”하며 남기었다. 나도 다 먹지를 못하고 남겼다. 그리곤 생각했다. ‘엄마는 된장만 풀고 끓였는데도 맛이 있는데 내가 한 것은 엄마와 똑 같이 했는데도 왜 맛이 없을까 이상하다.’ 그래서 또 냉이를 뜯어다가 끓여보았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엄마는 맛 좋다고 다 먹는데 큰언니를 비롯한 짠누나 동생은 반도 안 먹고 남겼다. 그 후론 냉이 국은 내가 끓이지 않고 엄마에게 마꼈다. 그리곤 유심히 보았다. 엄마는 내가 뜯어온 냉이를 씻고 또 씻었다. 그러더니 된장을 듬뿍 풀더니 한 참을 주걱으로 저었다. 그리곤 뚜껑을 닫고 한참을 두었다. 내 방식이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한 대로 된장만 풀고 했지만 엄마같이 정성을 들여 냉이를 씻고 또 씻고 된장을 풀고 주걱으로 한 참을 젓지 않았으며 뚜껑을 닫고 한참 후에 먹질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엄마같이 정성을 들이지 않은 거다.

그 후부턴 냉이 국 뿐만 아니라 일체 음식엔 손을 안 댔다. 그렇게 엄마같이 정성을 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짠누나 엄마가 음식을 만들면 맛이 좋았다. 뭐든지 정성이었다. 나는 이 정성 없이 건성건성 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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