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문학평론가

김주희 문학평론가

[동양일보] 애들 온다는데 그때 니들 또 올 거지?

그새 많이 노쇠해진 엄마는 남동생들이 엄마 집에 올 때면 먼저 언니 일정을 확인한다.

네가 와야 애들 밥을 해먹이지.

구십 노인이 칠십 먹은 자식 걱정한다더니 연세 구십 가까운 엄마는 아들들이 온다면 밥걱정을 먼저 한다. 자식 끼니 걱정은 죽을 때까지 못벗어나는 엄마의 개미지옥같은 건가. 카드 한 장 들고 있으면 먹을 게 널린 시대에도 끼니 걱정 못 벗고, 그 일을 언니와 나에게까지 의탁하다니. 칠십 다 된 딸에게 구순의 노모가 육십 언저리 아들 밥 해주러 내려오라니 어째서 아들은 늘 아들이고, 딸은 엄마를 대신해야 하는지. 아들은 늘 손님이고 딸은 늘 찬모냐고 언니와 나는 웃기도 분개하기도 한다. 엄마 생각은 장에 가면 맏딸이 동생 밥 차려 먹이던 그 시절 어디쯤 머물고 있는지.

엄마는 아프기 시작하면서 언니에게 더 의존하기 시작하고 하루에 다섯 번씩 전화를 거는 날도 있다. 어린애가 전화 장난하듯 사소하게 생각나는 것마다 전화를 걸어서는 전혀 연관없는 얘기로 길게 늘이기도 일쑤라고. 그럼에도 언니는 자주 엄마 상태를 잊는다. 바르게 이해시켜야 한다고, 그러면 나아질 것처럼 한나절만 함께 지내면 목이 아프다면서도 귀가 어두워진 엄마에게 전력을 다한다. 엄마 감정에 민감하고 엄마가 힘들다거나 싫어하거나 걱정하는 걸 못견뎌서 엄마집에 다녀가고 난 뒤면 한 바탕 앓기도 한다는 언니와 엄마는 교과서적 애증 관계일지.

모녀관계는 다른 관계보다 늦게 탐구되었다. 가족관계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처럼 재산이나 지위를 물려받는 공적인 일과 관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적이고 감성적 친밀관계에서 딸에게 엄마는 역할 모델이면서 반면교사이기도 하다. 딸들은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기도 하고, 비슷하게 살게 되기도 한다. 엄마에게는 딸이 자식이면서 친구이고 때로는 문제를 함께 인식하는 동지가 되기도 한다. 정서적 연대를 맺기 좋다는 건 그만치 거리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맹점도 있겠다. 그래서 모녀관계는 친하면서도 유독 심한 말까지 주고받기도 하는 사이로 규정되기도 한다. 혈연을 바탕으로 한 소중함과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안도와 함부로 함의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인다. 다른 심장으로 살아가는 가까운 타인일 뿐 자신이 될 수 없어도 엄마는 맏딸을 자기 연장으로 여기고 심리적으로 동일시한다고 한다. 둘 관계에서 안쓰러움도 분노도 대체로 거기 기인한다고,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관계가 모녀관계일 수 있다는 지적은 우리 엄마와 언니 모녀 관계에도 그럴 듯이 적중하던지.

정작 말한 엄마는 까마득 잊어버린 걸 언니가 붙들고 있을 때가 있다. 엄마는 둘째인 내게 관대한 것에도 맏딸인 언니에게 유독 기준을 높이기도 한다. 역설적 차별이랄까, 더 관심가는 자식에게 드리우는 편애의 그림자 같은. 세상 모든 첫 것들에 은총 있을진저!

사실 엄마는 지금 일관성이 없다. 기력이 좋다가 순식간에 약해지고, 총기 흐려져 잊은 듯하다가 세세한 일까지 기억해 내기도 한다. 슴슴한 반찬이 짜다고도, 매콤한 국을 칼칼하다며 잘 드시기도 한다. 맛이 있다고도 없다고도 같은 음식을 두고도 하신다. 그러니 매번 기대하고, 포기하고, 논리로 이해하려다가 열패감에 들기도 한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난감한 일이 반복되면서 우리 엄마 아프시다고 생각하기로 하지만 육친의 일에서는 그게 어렵다. 하여 지금 엄마 머릿 속처럼 우리 마음도 평화롭지 못하다. 와중에 엄마는 겨울 끝나 봄이 오고 다리 다 나으면 하신다는 계획이 창창하다. 봄 된다고 나을 다리가 아닌데 엄마는 봄만 되면 산후조리 끝낸 젊은 새댁처럼 몸이 가뿐해질 것으로 기대하시나보다. 기대하고 실망하고 울고 웃으면서 언니와 나는 마음 놓고 늙어갈 새가 없다. 엄마는 따셔지는 앞날 계획이 창창하고, 우리는 엄마 덕에 늙을 엄두내지 못하고 자매애도 도탑게 청청하니 아직 모두 다행이다. 다행이어서 다행이다. 엄마의 봄은 제대로 펼쳐질까, 곧 다가오는 명절이면 많은 집 딸들이 제집 남의 집에서 헛웃음을 웃기도 분개하기도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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