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탁번 시인 타계 1주기를 맞으며
글 김애자 수필가

원서문학관.
오탁번 시인

[동양일보]시인에게 고향은 어떤 의미를 지닌 곳일까. 태어난 공간에 대한 그리움의 진원이 되는 곳이었을까? 살붙이들과 살았던 유년의 기억들을 시적 상상력으로 재현시키는 문학적 시원이 되는 곳일까?

며칠 전, 오탁번(1943~2023)시인이 생전에 만들어 놓은 ‘원서문학관’을 찾았다. 2월 14일이 돌아가신지 1주년이 되는 날, 망연히 집에 있을 수만 없었다. 생전의 인연이 이제는 주인을 잃은 제천시 백운면 애련리의 문학관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게 했다.

아무리 좋은 집도 사람이 살지 않으면 폐허처럼 을씨년스럽다. 인적이 끊긴 원서문학관도 마찬가지였다. 철제로 된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대문 앞에서 까치발을 딛고 넘겨다본 잔디밭과 텃밭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마른 풀들의 잔해가 제멋대로 널브러져 있었다.

시인께서 처음 폐교된 분교를 매입했을 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설렘을 안고 주말과 방학만 맞으면 애련리로 차를 몰고 내려와 정원을 꾸미고, 텃밭에는 철따라 먹을 수 있는 남새를 가꿨다. 은퇴하자 곧바로 내려와 태어난 자리에서 붙박이로 살아가는 촌부들의 애환과, 산촌의 서정을 메타포 삼고 시를 채굴하는 기쁨도 한껏 누렸다. 아울러 몇 년 동안은 전국의 시인들을 초대하여 파티를 열곤 했었다. 새마을부녀회원들 손을 빌려 가마솥에 대학찰옥수수를 찌고, 돌확엔 막걸리를 가득 채워 놓았었다. 간장종지만한 종골바가지를 배처럼 띄워 놓았던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처럼 오탁번 시인은 천성이 유순하고 소박했으며 세상 물정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를 배우려고 찾아가는 후배들에게는 “시는 쉽게 써라” “지식 자랑 늘어놓지 말라” 등등의 충고를 할 땐 엄격했다.

이렇게 충주와 제천지역에 있는 문인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선생의 갑작스런 타계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가족들로부터 부음이 전해지던 날 충주문협 사무국장 이현복 시인은 문상을 가기 전에 먼저 원서문학관으로 달려갔다. 달려가선 스마트폰으로 사진 몇 컷을 찍어 내게 보내왔다. 사진 속에는 뜰 한쪽에 벗어 놓은 장화 두 켤레와, 문간 벽에 매달아 놓은 초록색 망사자루에 담긴 한 접 가량의 마늘이 유독 시선을 끌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멀리서 지인들이 보내온 뜯지 않은 택배 박스와, 우편함에 꽂혀 있는 우편물과 노천 나무 탁자에 놓여 있는 재떨이엔 선생님의 합죽한 입매로 깊숙이 빨아들이고 버린 담배꽁초가 소복이 담겨 있었다. 그날 시인이 남기고간 쓸쓸한 흔적들을 통해 시인의 죽음을 사실로 인정하는 과정은 실로 버겁고 허망했다. 선생이 유명을 달리하기 10일 전, 동양일보 회장인 조철호 시인과 인터뷰를 끝내고 “병원에 다녀오면 우리 송아지 한 마리 잡아 가든파티라도 열자”고 너스레를 떨었다던 조 시인의 조사 내용도 잊혀지지 않는다.

타계하신지 일주기가 되는 14일을 하루 앞두고 “보리저녁이 되면 어미젖 보채는 하릅송아지처럼 늘 배가 고프다” 던 오탁번 시인의 시 한 소절이 명치에 달라붙는다. 오늘 저녁답엔 나도 하릅송아지가 되었는가, 오늘따라 더욱 배가 고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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