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수필가

이은희 수필가

[동양일보]곁님은 다정다감한 사람이다. 설 밑이면 으레 세뱃돈 봉투를 손수 만든다. 빨간색 봉투 겉표지에 ‘복'福이란 글자를 정성껏 붓글씨로 쓴다. 조카들과 손주의 세뱃돈을 준비하고 명절을 기다리는 것이다.

집안의 어른으로 세뱃돈을 줄 조카와 손주 얼굴을 한 명 한 명 그리며 덕담을 생각하는 시간이다. 더불어 가족들에게 윷놀이 시간과 퀴즈 놀이 후에 선물도 줄 예정이란다. 명절이 아니면 어디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겠는가. 명절은 가족과 주변을 돌아보는 귀한 시간이다.

현관에 벗어놓은 가족의 신발을 바라보니 흐뭇하다. 칠 남매의 맏이라 가족 수가 많아 웬만한 식당을 잡기 어려운 지경이다. 명절과 대소사에 가족들이 우리 집에 모이니 넓은 평수의 집을 고수하는 상황이다.

성장기에는 바람 잘 날 없는 형제 많은 집이 싫었다. 맏이의 자리가 무겁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특히, 명절이 다가오는 게 감성으로 다가오지 않은 한때이다.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운 그 시절, 메마른 감정의 밑바닥을 본 듯 서글픈 기억이다. 그래서 명절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이 든 적도 있다. 돌아보니 정작 챙겨드려야 할 부모님이 계시지 않아 그런 마음이 컸으리라.

부모님이 안 계신 명절 어느 해인가. 동생들이 각자 시댁을 다녀와서 ‘우리는 찾아갈 친정도 없고, 큰언니가 엄마 대신이지 않으냐’라고 눈물을 머금으며 말하는 게 아닌가. 동생의 그 말이 가슴에 화인처럼 박혀 아팠다. 그날로 내 마음가짐도 달라지고 진정한 맏이로 거듭난 듯싶다.

정녕코 세월이 흘러야만 알게 되는 지혜가 있음을 몰랐다. 가족과 형제의 소중함을 나이가 들어가며 깊어진다.

형제들은 이제 모두 성장하여 어엿하게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두서 명씩 낳아 평범하게 지내고 있다. 조카들도 대학생으로, 국방의 의무로 집을 떠나는 등 잘 성장하였다.

그래, 가족들이 여러 분야에서 생활을 잘하고 있으니, 무엇이 부족하랴. 명절이면, 서로 보고 싶어 한곳에 모여 어우렁더우렁 지내고, 자매도 동서 간도 동안에 못다 한 이야기를 왁자그르르하게 풀어놓는 시간이 좋다.

인구 부족으로 걱정하는 나라에서 칠 남매가 스물여덟 명의 가족으로 늘었으니 참으로 애국자나 다름없다. 최근에는 손주까지 삼대가 한자리에 함께하니 더 바랄 게 없다.

손주들이 꼬물거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예전의 내 모습을 손주가 그대로 대를 잇는 듯하다. 한복을 입고 뒤뚱거리며 세배하는 모습도 귀엽고, 고사리 같은 두 손으로 세뱃돈을 받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집안에 웃음이 잔즐잔즐 피어나니 흐뭇하다. 명절에는 역시 대가족이 모여 왁자지껄해야 제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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