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유영선 동양일보 주필

[동양일보 유영선 기자]설 연휴가 끝나고 만난 뉴스 중 가장 충격적인 뉴스는 네덜란드 전 총리부부의 ‘동반 안락사’ 소식이었다. 올해 93세가 된 판 아흐트 전 총리와 부인 외제니 여사는 자택에서 나란히 눈을 감은 것으로 알려졌다. 부부 모두 건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네덜란드는 2002년 세계 최초로 적극적 안락사를 합법화한 나라다. 불치의 병에 걸린 등의 이유로 치료 및 생명 유지가 무의미하다고 판단되는 사람에 대하여 직·간접적 방법으로 고통없이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안락사는 자살과는 다른 죽음이다.

안락사가 합법적이지 않은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죽음이 낯설지만, 유럽의 여러 나라에서는 ‘죽음의 자기결정권’에 의한 안락사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편이다.

영화 같은 안락사 장면이 있다. 스웨덴의 전직 승려였던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가 전한 그의 아버지의 죽음의 장면이다.

나티코의 아버지는 만성폐색성 질환을 앓고 있었다. 2018년 6월초 나티코가 부모님의 여름 별장을 찾았을 때 아버지는 나티코에게 “비욘, 시간이 많지 않아. 나는 얼마 못 살 거란다. 나는 병원에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고 싶지 않다. 질병이 마수를 뻗치기 전에 끝내고 싶구나”라고 말한다. 아버지는 당신 인생이 더 살 가치가 없다고 느껴지면 그 생을 끝낼 권리가 있다고 늘 주장했기 때문에 가족들은 아버지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다. 스웨덴에서는 안락사가 불법이므로 외국인의 안락사를 도와주는 스위스의 어느 기관을 찾았고, 7월26일이라는 날짜를 받았다. 아버지는 스위스 바젤에서 죽기로 한다.

7월 26일, 가족들은 바젤의 한 호텔에서 만나 옛일을 회상하고 짓궂은 농담을 던지고 한바탕 웃고 아버지는 고맙다는 인사를 반복했다. 그리고 다 함께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바젤 외곽의 장소로 이동했다. 중앙에 침대가 놓인 쾌적한 방에 아버지가 눕고, 가족들은 준비해온 에베르트 타우베의 노래와 스코틀랜드 백파이프 연주곡을 틀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세 형제와 나티코는 눈을 맞추며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노란 장미꽃다발을 아버지에게 건네며 작별인사를 했다. 이윽고 의사가 링거스탠드 뒤에 서자 아버지는 스스로 주사제의 밸브를 열었다.

혈관으로 액체가 흘러들어가는 순간에도 아버지는 “이봐요, 크리스티안, 링거에 엉뚱한 걸 넣진 않았겠죠?”라고 농담을 던진다. 2분 뒤, 강렬한 무엇인가가 아버지의 눈에 비쳤고, 모든 근육이 작동을 멈췄다. 아버지의 온화한 얼굴에서 경이로움 같은 것이 보였다. 어린아이의 얼굴에서나 보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 글을 쓴 나티코는 1961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명상지도자다. 그는 대학 졸업 후 다국적 기업에 근무하며 스물여섯 살에 최연소 임원으로 지명되지만, 그 자리를 포기하고 사직서를 낸 후 태국의 밀림에 있는 사원으로 들어간다. 이곳에서 그는 ‘나티코’, 즉 ‘지혜가 자라는 자’라는 법명을 받고 파란 눈의 스님이 되어 17년간 수행했다. 그리고 승려로서 지킬 엄격한 계율조차 편안해지는 경지에 이르자 마흔여섯의 나이에 승복을 벗었다. 나티코는 수행이 끝나갈 무렵인 2018년 루게릭병 진단을 받지만, 명상수련회를 이끌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명상을 가르치고 혼란스러운 일상속에서도 마음의 고요를 지키며 살아가는 법을 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병이 깊어지자 그 역시 스스로 안락사를 선택한다. 60세가 되던 해인 2022년 1월 17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담담히 죽음의 세계로 들어갔다.

“1월 17일 한낮이었습니다. 저는 사랑하는 이들에게 둘러싸여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주어지는 음료를 한 잔 마시고 조용히, 평화롭게 잠들었습니다.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이.”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거대한 애도의 물결이 스웨덴을 휩쓸었다. 비욘 나티코 린데블라드.

오늘 아침엔 루게릭병으로 몸의 기능을 잃어가면서도 세상에 유쾌하고 따뜻한 지혜를 전한 그가 남긴 마지막 책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를 다시 펼쳐 든다. 그가 경험했고 배웠고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담은 용기와 위로를 주는 책. 그는 내가 흔들릴 때마다, 갈등에 빠질 때마다, 교만해질 때마다 마법 같은 주문으로 지혜를 일러준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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