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애정 시인·충주 문향회장

안애정 시인

[동양일보]결혼하고 충주에서 산 지 30년이 넘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충주가 낯선 곳이면서 남편의 고향도 아닌지라 떠날 생각을 했었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나 복잡한 도시는 싫다는 남편 말에 나도 수긍하며 전라도 광주나 충남 대전쯤으로 이사를 꿈꾼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서울에 살고 계셨던 시부모님은 며느리 친정 가까운 곳으로 간다는 말에 언짢아하셨다. 꼭 그 말씀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당시 외벌이였던 남편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니 흐지부지 없었던 일이 되어 버렸다. 그러기에 내가 친정 가까운 곳으로 이사할 리는 없었다. 또한 전남 영광에 사는 친정 부모님이 충주로 올 리도 없다고 생각했다.

교통사고로 친정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신 지 20여년이 지났다. 이후 친정엄마는 고향에서 혼자 사셨다. 일 년에 한두 번 오는 아들과 딸을 맞이하고 보내고, 가까이 살아 자주 오는 막내아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농사를 지으며 지내셨다.

그 동네에서 태어나 같은 마을 출신의 친정아버지와 결혼한 후 계속 그 마을에서 사셨던 엄마가 그곳을 떠날 일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해마다 큰 회사에 다니는 장남 덕에 건강검진을 늘 받으셨고 나름 무탈하게 잘 지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오랫동안 혼자 살았던 엄마의 몸은 병들어가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엄마가 이명과 두통에 시달리느라 잠을 잘못 주무신다고 하였다. 큰 남동생이 서울 대학병원에 모셔가 검사를 받았지만 큰 이상은 없고, 약만 드시면 괜찮을 거라고 하셨다. 그때 세 자식 누구든 '이제 괜찮다'라는 엄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지 않았어야 했는데, 본인 살아가는 것이 우선이었던 우리는 매일 묻는 안부 전화와 전보다 빈번해진 방문으로 제 할 일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그리고 몇 달 후 찾아온 전혀 예상하지 못한 뇌경색. 몇 달간의 병원 생활 이후 혼자 살 수 없는 엄마를 누군가는 모셔야 했다.

큰 남동생이 회사 앞에 주택을 새로 지어 모신다고 했다. 하지만 남동생 출근 후 혼자 계실 엄마를 생각하면 참 막막했다. 조심스럽게 남편에게 엄마를 모시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다행히 남편은 나만 괜찮으면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함께 살고 있는 작은딸에게도 의견을 물으니 함께 할머니를 보살피겠다고 했다.

그날 이후 충주 단월에 집을 짓고 엄마를 모시며 현재 살고 있다. 딸과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엄마와의 동거는 서로 낯설었고 삐걱거렸다. 엄마는 딸에 대한 미안함을 투덜거림으로 표현하였고, 나도 엄마를 모심으로써 자유로웠던 내 생활이 어긋나니 가끔 화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함께 산 지 2년이 넘어가는데 지금은 나름 잘 지내고 있다.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은 잘 못하지만, 어제보다는 살갑게 살아가고 있다.

“엄마, 나랑 사니까 좋지?”

“그럼, 너랑 산 게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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