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희 청주시사회복지연구소 소장

이순희 청주시사회복지연구소 소장

[동양일보] 겨울 같지 않은 포근한 주말에 철원의 한탄강 고석정에서 물 윗길을 걷고 주상절리 길을 걸었다. 절벽에 아직 녹지 않은 눈으로 곳곳에 얼음산이 보이고 그 사이로 폭포처럼 물이 흘러내리는 모습은 일품이었다.

고석정(孤石亭)은 철원 8경 중 하나이며, 철원 제일의 명승지이다. 한탄강 한가운데 치솟은 바위산의 양쪽 사이로 물이 휘돌아 흐른다. 유네스코가 인증한 철원 한탄강 주상절리 길은 총길이 3.6㎞에 이른다. 화산활동이 만들어낸 한탄강 일대의 독특한 지형을 감상할 수 있다. 걷는 길에 영화 촬영지였음을 알리는 영화표지판이 곳곳에 걸려있다. 철원 하면 임꺽정 고사가 떠오르는데 고석정이 바로 그 배경지가 됐다. 기암절벽과 비경이 가히 그럴만했겠다 싶었다. 임꺽정은 당시 함경도 지방으로부터 이곳을 통과해 조정에 상납할 조공물을 탈취한 도적이지만, 그것을 빈민 구제에 쓰는 등 부패한 사회에 항거한 의적이라 전해진다. 이런 깊숙한 곳에 진지를 틀고 어려운 백성들을 도와주었다는 임꺽정에 요즘 재미있게 본 ‘밤에 피는 꽃’ 이라는 드라마가 오버 랩 되었다. 혼인 첫날 얼굴도 모르는 남편이 죽어 15년간을 조신한 수절과부로 산 여화(이하늬 역)가 밤이면 검은 복면을 쓰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도와주는 이중생활을 그린 가상 퓨전 사극이다, ‘밤에 피는 꽃’은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아이들 인신매매,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 구중궁궐의 암투 등을 다뤘다. 핍박과 억압받던 여성들에겐 자유를, 자신의 욕심 때문에 온갖 나쁜 짓을 일삼는 이들에겐 벌을 주며 시원함을 선물했다. 여기에 코믹하기 까지 하다. 무엇보다 이하늬 배우의 명연기는 매력 만점이었다.

‘밤에 피는 꽃’을 집필한 정명인 작가는 “담 넘고 선 넘는 이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 조선 시대 가장 많은 제약을 받았던 여성, 그중에서도 과부라고 생각했다. 힘겨운 처지에 서 있던 조여화라는 인물이 일단 한번 용기를 내어 담을 뛰어넘고 선을 건너보라고, 그러면 결국 그 담이 무너지고 선은 없어질 거라고. 현실에 지쳐 좌절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주인공의 용기가 결국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바꾸고,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다는 주제의 강력한 여성 히어로지만 허당기와 인간미로 무장한 과부 여화의 모습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했다. 작가의 의도는 정의를 갈망하고 작금의 정치에 혐오를 느끼는 사람들의 가려운 곳을 잘 짚어냈다는 생각이다. ‘모든 백성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임금을 독살하고 권력을 휘두르는 좌상은 온갖 구린 짓으로 부와 명예를 누린다. 검은 복면은 그 좌상의 수절과부 며느리다. 좌상은 며느리에 의해 모든 죄상이 드러나자 이 모든 것이 다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항변한다. 그들이 말하는 나라는 모든 백성의 나라가 아니라 기득권층의 나라, 사대부들의 나라다. 결말은 공적으로 처벌 받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최근 죄 없는 사람들이 황당한 폭력을 당하지만 국가의 공적 도움을 받지 못한 사례를 많이 보게 된다. 이를 본 많은 시민이 분노하고, 더러는 억울해서 사적으로 제재를 가하는 경우가 보도되기도 한다. 사적 제재란 국가 또는 공공의 권력이나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 개인이나 사적 단체가 특정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 좁은 의미로는 법적 절차 없이 개인적으로 죄인에게 내리는 형벌을 의미한다. 법치국가에서 사적 제재는 금지된다. 아무리 악한 범죄자를 폭행하거나 죽인다고 해도 일개 개인이 다른 개인에 대해서 폭행이나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엄연한 범죄다. 사적 폭력을 금지하고 국가가 모든 폭력을 독점하게 한 것이 국가공동체이고 이를 운영하기 위해 우리는 정치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폭력을 독점한 국가가 폭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 없도록 족쇄를 채우는 것이 바로 민주주의라는 체제이다. 국가가 왕처럼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법과 제도에 따라 움직이는 체제를 만든 것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를 만들었으니 지켜내야 한다. 누구든 범죄를 저질렀으면 응당 죄값을 받게 하고,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국가권력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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