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묵 시인

최은묵 시인

[동양일보]우리 속담에 ‘빛 좋은 개살구’가 있다.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에 가치를 두는 세상을 꼬집는 말이다. 겉은 화려하게 꾸몄으나 속은 추악하다는 금옥패서(金玉敗絮)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흔히 양면성을 일컬을 때 ‘앞과 뒤’나 ‘겉과 속’이라는 말을 쓴다. 세상 누구도 앞과 뒤 그리고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의 정도가 큰 사람이 있고 작은 사람이 있다. 이때 크고 작은 기준이 무엇이다 딱 꼬집어 나눌 수는 없지만, 보편적으로 어느 경계의 범주를 우리는 상식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인간의 양면성에 대한 상식은 앞뒤나 겉속의 차이가 작은 값에 부합한다고 봄이 보편적일 것이다.

물건을 싸거나 꾸린다는 포장(包裝)의 다른 뜻으로는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다는 의미도 있다. 이렇게 부정적인 의미가 발생한 까닭은 겉과 속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는 보이는 겉에 비중을 두느냐 아니면 보이지 않는 안에 비중을 두느냐에서 파생한다.

안과 밖 그리고 겉과 속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그것이 과할 때 갈등이 발생한다. 하지만 과함의 기준은 항상 모호한데, 그 이유는 의도를 판가름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장(僞裝)은 어떠한가. 포장과 달리 위장은 그 의도가 분명하다. 본래의 정체나 모습이 드러나지 않도록 거짓으로 꾸미는 것이 위장이다.

우리는 작은 물건 하나를 구입할 때도 살펴 비교하여 고른다. 하물며 사람을 만나고 어울리는 일은 그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포장과 내용물의 차이가 별로 없는 물건을 구입했을 때 만족도가 큰 것처럼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양두구육(羊頭狗肉)’이란 말이 입에 자주 오르내린 적이 있다. 양두구육 또한 겉과 속의 차이를 이르는 말 중 하나다. 세상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속이고 누군가는 속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늘 그래왔다는 통념적 문제로 단순히 치부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포장과 위장을 걸러내는 장치가 불완전하게 작동하는 작금에 속은 사람에게 피해를 전가하는 건 옳지 않다. 포장은 상식의 범주에서 이루어져야 타당하다. 내면을 돋보이게 만들 때 포장의 역할은 가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꾸밈은 속임수가 아니라 어울림이어야 한다. 숱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사회에서 내가 하는 꾸밈이 무엇을 위함인지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겉과 속을 조화롭게 다듬는 일이야말로 삶의 당연한 책무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사람의 속은 여전히 알기 어렵다. 돌아선 사람의 표정을 보지 못하듯이 보이는 모습이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니 표면에 드러난 몇 가지로 누군가를 정의하는 일은 조심해야 한다.

요즘 정치가 혼란하다. 편 가르기가 고착되고 이성보다 감정으로 치닫는 정세를 볼 때마다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처지에서 마음이 편치 않다. 정치란 무릇 국민의 마음을 매만지는 일일 텐데 어느새 마음을 가두는 힘으로 작동하고 있다.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에서 금옥패서가 아닌 정치인을 기대한다는 건 실로 막연하다. 그렇더라도 우리는 방관하지 말고 주시해야 한다. 누가 국민의 마음을 어루만지는지, 누가 같은 눈높이에서 바라보는지, 누가 입을 닫고 귀를 열어두었는지 살피고 비교하고 골라야 한다.

더 이상 위장한 사람이 자리를 차지할 수 없는 세상이 오면 좋겠다. 앞뒤가 다르고 겉과 속이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이 국민의 대표로 선출되는 일은 불행이다. 투표는 단순히 도장 하나를 찍는 행위가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일이다. 이런 마음에 사사로움은 배제해야 한다. 마음을 주는 사람도 불안하고 받는 사람도 불안한 뇌물이 사라지고, 주는 사람 받는 사람 모두가 편안한 선물이 오가는 세상이면 좋겠다. 국민의 이익을 위한 정치야말로 선물이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정치가 바로 뇌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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