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경재 충북경제자유구역청장

맹경재 충북경제자유구역청장

[동양일보]친구 이야기를 빼놓으면 나의 소년 시절은 존재하지 않는다. 친구에 대한 소중한 기억이 무궁무진하다.

복지에 관한 철학을 심어준 친구 인호 이야기다. 그는 지능이 좀 낮았는데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고 세 살 아래인 나하고 어울렸다. 인호랑 손바닥만 한 평평한 돌을 발 위에 얹어 놓고 앞에 세워 둔 상대방의 돌을 넘어뜨리는 비석치기를 자주 하였다. 또 숨바꼭질도 자주 하였는데 내가 주로 이겼다.

저녁이 되어 집으로 돌아갈 때면, 자기보다 세 살이나 어린 나에게 늘 놀이에 져서 그랬을까, 나를 ‘십 원짜리 경재’라고 놀렸다. 이름이 ‘경재’이다 보니, 내 이름을 가지고 놀려대는 것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인터넷 검색이 발달하여 어른들이 쓰는 과한 욕을 가끔 쓰기도 하는가 본데 그 시절에는 아이들이 어른들이 쓰는 거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친구 딴에는 ‘십 원짜리 경재’라는 말이 내게 할 수 있는 가장 거친 감정의 언어였다. 그러면 나도 발끈하여 인호와 싸우곤 했지만, 다음날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어울려 놀았다.

인호는 받아 줄 학교가 없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다. 그 시절 철이 들지는 않았으나 인호와 어울리며 한 가지 작은 소망이 생겼다. 내가 언젠가 어른이 되면, 인호 같은 사람도 함께 어울려 살 사회를 만들고 싶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인호가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나 놀랐다. 그의 나이 겨우 22살이었다. 나는 도시로 나와 공부하느라 인호의 형편은 자세히 몰랐으나 그가 사회에 적응하긴 쉽지 않았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는 지금처럼 사회 복지체계가 지방까지 미치지 않았고, 사회적인 인식도 많이 부족했다. 사회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정상적인 사회에서 밀려나 그가 죽음을 선택할 만큼 고통받았던 건 아닐까.

그 후 나는 소중한 친구를 잃은 충격과 안타까움, 약자에 대한 사회적 배려와 보호에 관한 고민이 깊어졌다. 그래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게 되었고, 사회복지사 1급 자격증도 취득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장애인 분야의 교사로 활동하고자 국내 특수교육학과를 찾다가 대구대학교 특수교육학과를 가기로 마음 먹었다. 경상북도 공무원을 응시하여 희망지를 대구 근처 선산군으로 선택하여 발령받았다. 선산읍과 옥성면 해평면에 근무하며 야간대학에 갈 기회를 엿보았다. 선배님들과 상의해보니 꿈도 꾸지 말라고 하였다. 그때 나는 새벽부터 퇴비 증산 독려를 나가야 했고, 밤에는 반상회다 뭐다 야근이 빈번한 상황이었다. 대학 진학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꿈을 접고 충북 증평으로 오게 되었다. 이후 사회복지팀 근무를 하면서 청주대 사회복지대학원을 다녔고, 복지부를 지원하게 된 것도 나의 친구, 인호 영향이리라. 사람은 누굴 만나고, 친구가 누구냐에 따라 진로의 방향이 정해지거나 바뀌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친구가 내 이름을 갖고 ‘십 원짜리 경재’라고 놀려도 좋다. 그 시절 답변하지 못했던 ‘십 원짜리 경재’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친구에게 알려주고 싶다. 강물이 흐르는 고향에서 친구랑 쓴 소주라도 나누고 싶은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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