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포석조명희문학관 문학박사

강찬모 포석조명희문학관 문학박사

[동양일보] ‘완위각(宛委閣)’은 담헌(澹軒) 이하곤(1677~1724)이 진천 초평에 지은 18세기 조선의 4대 장서각(藏書閣, 사립도서관)-안산의 유명천의 청문당(淸聞堂)과 유명현의 경성당(竟成堂), 서울의 월사(月沙) 이정구 고택-중 한곳으로 일명 ‘만권루(萬卷樓)’라고 불렸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에서 만 권의 의미는 장서의 기준이고 장서가의 꿈이며 지식인을 상징하는 박학다식의 배경이다. 설령 책을 쌓아만 놓고 읽지 않는 호사가의 허장성세라고 해도 책은 그 자체로 선하며 유의미하다. 문자향 서권기(文字香 書卷氣), 책은 그런 것이다.

주목해볼 대목은 완위각이 있던 ‘지리’적 위치다. 3대 장서각이 서울 경기 소재인데 반해 완위각은 진천, 그것도 ‘초평(면)’이라는 벽지에 있었다는 점이다. 진천이 ‘기전((畿田)지방’을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라고 해도 서울 경기에 비해 물리적으로 오지일 수밖에 없는 거리다. 개인 장서각이라는 점이 고려의 대상이 되겠지만 당시 일반적 통념을 벗어난 위치에 완위각이 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도서관이 당대의 첨단 지식이 유통되며 공유되는 열린 공간이란 점을 환기한다면 문화적 위상과 지리적 거리와는 별개라고 할 수 있다. 도서관이 존재하는 장소와 공간이 곧 문화의 중심이며 시대정신의 첨병이기 때문이다.

완위각은 이하곤이 말년에 출사의 길을 단념하고 은일처사(隱逸處士)의 삶을 택하며 책을 벗 삼아 시를 짓고 서화를 치며 시인 이병연 · 문신 신정하 · 원교(圓嶠)이광사 · 공제(恭齋) 윤두서 · 겸제(謙齋) 정선 등 당대의 문화 명사인 시인 묵객들과 소통하며 강학(講學)을 즐겼던 공간이다. 명사들의 구체적인 면면은 잘 모르더라도 이광사의 ‘서예’ 윤두서의 ‘자화상’ 정선의 그 유명한 ‘진경(眞景)산수화’ 등은 학창시절 익히 주워들은 풍월이 있는 내로라하 는 인물들이다. 완위각은 골동의 아취를 완상하는 사랑방이 아니라 조선 후기 명망 있는 ‘셀럽(celebrity)’들이 진천에 머물거나 왕래하며 세상을 보는 ‘창(窓)’이었다. 앎에 목마른 지식인들과 보다 넓은 세상을 향한 선각자들의 강렬한 지적 호기심이 충만했던 담론의 현장이기도 했다.

이러한 담론의 중심에 ‘양명학(陽明學)’이 있었다. 완위각은 조선 양명학의 태두인 하곡(霞谷) 정제두(1649~1736)가 창학한 ‘강화학파’의 마지막 거점이던 곳이다. 진천 강화학파는 조선 후기와 근대에 진천에서 활동한 지식인과 독립 운동가 중에 정제두의 양명학을 이어받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주요 인물로는 문원(汶園) 홍승헌 · 기당(綺堂) 정원하 · 학산(學山) 정인표 · 연재(淵齋) 정은조 · 보재(溥齋) 이상설 · 위당(爲堂) 정인보 등을 꼽을 수 있다.

양명학은 송대의 주자학과는 달리 명대의 왕양명에 의해 주자학에서 새롭게 분파된 학문(사상)인데 주자학의 ‘이학(理學)’과 달리 ‘심학(心學)’을 중심으로 한다. 우리 귀에 익숙한 ‘지행합일(知行合一)’이 양명학의 대표적인 삶의 철학이다. 사물과 이치를 이(理)와 기(氣)로 분리하지 않고 하나로 보는 역동적이며 통합적인 성격을 갖는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으로 세상을 보기 때문에 차별을 배제하는 ‘평등주의’가 가능했다. 당시 현실에서는 전위적이며 혁명적 요소가 다분한 철학 사상이었다. 주자학 외에는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규정하여 멸문지화를 시키는 지배체제에서 양명학은 정제두가 ‘안산’에서 ‘강화’로 이주하면서 ‘강화학파’란 이름으로 거듭난다. 한국적 양명학의 본격적 태동인 셈이다.

초기에는 가학(家學)으로 학맥을 이어오다 구한말 위난의 시기가 닥쳐오자 점차 뜻 있는 우국지사들이 모여들어 국권 회복의 정신으로 강한 실천성을 띤다. 강화학파의 정신은 근대의 주체적 민족정신으로 발전하여 많은 애국지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대표적으로 이회영의 6형제와 이상설 등 실제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거나 뛰어든 인물들의 핵심 사상이 되었다.

이렇듯 정제두 이후 200년 강화학파의 최후의 불꽃이 타올랐던 곳이 바로 완위각이며 그 완위각이 있는 곳이 ‘생거진천’이다. ‘문(文)’으로 세상을 바꾸려했던 포석과 ‘정(政)’으로 나라를 되찾으려했던 보재 그리고 ‘상무(尙武)’ 정신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했던 동천(東 天) 신팔균(1882~1924) 등은 풍찬노숙하며 이역만리에서 근대의 여명을 적극적으로 열어 젖혔던 진천의 걸출한 인물들로 이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솟아난 ‘봉우리’가 아님을 완위각은 생생하게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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