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창식 충북도 환경정책과장

강창식 충북도 환경정책과장

[동양일보]가끔 이웃 동네 대전에 가면 도로표지판에 적힌 이름이 눈길을 끈다. 대전역 네거리, 증촌네거리, 중앙로역 네거리와 같이 우리말로 쓰인 부분이 그렇다. 보통 도청사거리, 상당사거리처럼 한자말로 적힌 이름과는 다르다. ‘네거리’면 어떻고, ‘사거리’면 어떻냐, 뭐 그리 딱딱하게 구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우리말과 한자말은 와닿는 그 느낌이 사뭇 다르다. ‘하나, 둘, 셋, 넷, 다섯...’은 우리말이고 ‘일, 이, 삼, 사, 오...’은 한자말이다.

그러고 보면 사회 발전과 함께 요즘 우리말의 설 자리는 점점 잃어가고 있다. 우리말이 있는데도 영어를 섞거나 바꾸어 쓰기도 하고, 행정용어가 많이 순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려운 중국 한자말 투성이다.

사실 영어는 우리말을 몰라서 쓰는 경우는 드물다. 흔히 ‘나는 유식해’이거나 ‘난 이런 것도 알고 있어’하는 우월함을 은근히 드러내기 위해 쓰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한자말도 다르지 않다. 조금 어려운 한자말을 써야 좀 배우고 잘 아는 사람처럼 보여지는 심리가 깔려있다.

보기를 들어 ‘수확하다’는 말이 있다. 곡식 따위를 거둬들인다는 뜻인 ‘수확하다’는 말을 요즘 덮어놓고 쓰는 경우가 많다. 어떤 농작물이냐는 따지지 않고 감자며, 대추며, 감이며 아무 농작물에다 갖다 붙인다. 하지만 우리말은 서술어가 잘 발달돼 있고 뜻이 명확하게 구분돼 있다. ‘대추를 따다’, ‘고구마를 캐다’, ‘고사리를 뜯다’에서 볼 수 있듯 ‘따다’, ‘캐다’, ‘뜯다’ 그 쓰임새가 정해져 있고 그 쓰임새에 따라 정확히 써야 의미전달이 명쾌해진다.

‘착용하다’는 말도 그렇다. ‘모자를 쓰다’, ‘안경을 쓰다’, ‘옷을 입다’, ‘신발을 신다’처럼 그 쓰임새에 따라 우리말은 예쁘고 명쾌하다. 그런데도 모자며 안경이며 옷이며 신발이며 몸에 걸치는 것에는 죄다 중국 한자말인 ‘착용하다’를 붙인다. 그러니 의미전달이 흐리다.

시내버스를 타고 내릴 때도 중국 한자말은 여전하다. 버스 앞문에는 ‘타는 곳’ 해도 좋을 것을 ‘승차’라고 써 붙이고, 뒷문에는 ‘내리는 곳’ 해도 좋을 것을 ‘하차’라고 딱딱한 한자말을 써 붙여 놓았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내가 어릴 적에도 자식이 학교나 직장을 나설 때 부모님들은 ‘길 건널 때 조심해’라고 했지, ‘도로 건널 때 조심해’라고 하지 않았다. 길이 도로로 바뀐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영어는 굳이 보기를 들지 않아도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우리말과 확연히 구분되기에 걷어내는 건 비교적 수월한 편이다.

십여 년 전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 학위를 준비할 때가 생각난다. ‘The study of administration’이란 논문은 행정학의 첫 시작으로서 행정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원어인 영어로 꼭 공부를 한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사실 영어능력이 별로였던 나조차도 1887년 쓰여진 그 영어 논문 원본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1919년에 쓰여진 대한독립선언서를 한번 보자. 어려운 중국 한자말 투성이라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한국 사람이라도 알아듣기 힘들어 해설서를 같이 봐야만 하는 형편이다.

우리말은 실제 우리 입에 붙어서 쓰는 말이고 조상 대대로 써온 말이어서 우리 정서에 잘 맞고 디엔에이(DNA)도 이를 잘 기억하고 있다.

알다시피 중국은 자기들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이 골수에 박혀 있어서 외국말을 숫제 쓰지 않는다. 아무리 어려운 영어도 중국말로 다시 고쳐서 쓴다.

우리는 어떠한가. 영어나 어려운 중국 한자말 같은 외국말을 오히려 못 써서 안달이 난 사람들을 만날 때도 있다. 말은 그 나라의 자부심이자 긍지이다. 우리말을 사랑하고 소중히 쓰는 풍토가 곧 일류국가의 지름길이라는 건 두말하면 잔소리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