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환 선생의 초상화와 설교일기 첫 장.
김성환 선생의 초상화와 설교일기 첫 장.

 

[동양일보 김미나 기자]‘오강의 흐르는 물소리는 목메네/삼각산의 용보는 찡그리는 구나/다 이 같으니/원컨대 속히 나를 죽이라’ -김성환 선생의 ‘설교일기’(雪窖日記) 중에서

일제 강점기, 일제의 탄압에 항거하다 투옥된 조선시대 한 유생의 시(詩)가 절절하고도 비장하다.

청주 낭성면 이목리 양달마을에서 태어나 항일운동을 했던 김제환(1867~1919)·김성환(1875~1958) 형제의 이야기가 105주년 3.1절을 앞두고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김성환 선생의 손자 김진호(78) 전 낭성우체국장이 이상주(70) 중원대 한국어교육문화학과 교수와 함께 27일 동양일보를 찾아 김성환 선생의 설교일기를 공개했다.

김성환 선생의 손자 김진호(왼쪽) 전 낭성우체국장이 이상주 중원대 한국어교육문화학과 교수와 함께 동양일보를 찾아 선생의 설교일기를 설명하고 있다.
김성환 선생의 손자 김진호(왼쪽) 전 낭성우체국장이 이상주 중원대 한국어교육문화학과 교수와 함께 동양일보를 찾아 선생의 설교일기를 설명하고 있다.

 

김 전 국장은 “오직 애국심 하나로 일제에 맞서 조국의 안위를 수호하고자 헌신했던 조상들의 이야기를 누군가는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라며 “오래된 옛날 이야기 같지만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겪었던 결코 멀지 않은 역사의 기록이란 점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했다.

설교일기는 1913년부터 1944년 사이에 김성환 선생이 한지로 만들어진 가로 15cm, 세로 21cm 크기의 노트에 붓글씨로 깨알같이 기록한 87일간의 일기다. 항일운동을 하다 유치장에 끌려갔다 풀려났다를 반복하면서 집으로 돌아왔을 때마다 쓰여진 일기로 추정된다. 항일운동을 하다 일본 헌병에 끌려가 겪었던 고초와 고문, 당시의 심정 등이 총 129쪽에 걸쳐 상세히 적혀 있다.

 

‘왜가 소당 선생(단식투쟁을 했던 형 김제환을 뜻함)에게 수건으로 입을 막고 항문을 통해 기계로 음식을 넣어 생명을 연장시키고자 했다’, ‘두 손에 자물쇠를 채우고 끈으로 허리를 매고 짚으로 만든 모자를 씌우는데’ 등 끔찍한 고문을 묘사한 문구들을 통해 당시 일제의 탄압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케한다.

이상주 교수는 “형인 김제환 선생은 옥중일기, 동생인 김성환 선생은 설교일기를 남겼는데 현재까지 청주는 물론 충북을 아울러 두 형제가 함께 항일투쟁을 하고 그 체험과 항일의식을 시와 일기 두 갈래로 남긴 사례는 이들이 유일하다”며 “충북 항일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설교일기 원본(오른쪽)과 1997년 만들어진 번역본
설교일기 원본(오른쪽)과 1997년 만들어진 번역본

 

김제환 선생은 나라를 지키지 못한 죄책감으로 산속에 움막을 짓고 단식투쟁을 하다 1919년 목숨을 잃고 해방 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됐다. 아쉽게도 그의 옥중일기는 현재 사라진 상태다.

김성환 선생 초상화
김성환 선생 초상화

 

동생인 김성환 선생은 다행히 꿈에 그리던 조국의 독립을 살아생전에 목격했다. 그러나 일제의 고문으로 허리를 다쳐 평생 지팡이에 의지해서 살았다고 한다. 설교일기를 통해 2019년 독립유공자에 이름을 올렸다.

이 교수는 “요즘 젊은이들이 국가관이 없는게 제일 안타깝다”며 “역사의 기록들을 보존할 수 있는 현대화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 조상들의 항일정신, 민족정기는 사라져 갈 것이기에, 자료들을 기록화하고 데이터베이스화하는 사업을 적극 전개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글·사진 김미나 기자 kmn@d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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