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박병기 한국교원대 윤리교육과 교수

[동양일보]꽃샘추위가 남아 있겠지만 그것을 기꺼이 감내하게 하는 봄기운 또한 완연하다. 지난 주말 찾은 지인의 복숭아밭은 사오월이면 망울을 터뜨릴 준비로 부산했다. 삼월이니 봄은 시나브로 다가오다가 어느 날 문득 진달래와 개나리, 벚꽃의 순서로 활짝 피어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 세상에는 좀처럼 봄이 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2년을 넘긴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은 유럽연합이 참전하면 핵무기를 사용할 것이라고 말하는 러시아 푸틴의 엄포로 공포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북한이 우리를 주적으로 규정했다는 소식은 그리 놀랍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아들을 군에 보내놓은 집안의 느낌은 사뭇 다를 것이다.

국내적으로는 사월 총선을 둘러싼 논란이 도를 훌쩍 넘어서고 있다. 거대 양당 모두 시스템 공천이나 명료한 기준을 전제로 하는 공천을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 전개 상황은 답답하기 그지없다. 여당은 현역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곳곳에 자신들의 뜻을 담은 사람들을 공천하고 있고, 야당은 이재명대표의 안위를 지켜줄 이른바 호위무사들을 노골적으로 공천하고 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다보니 이번 총선의 성격이 정권심판과 야당대표 심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면서 유권자들을 혼란과 절망, 무관심으로 내몰고 있다.

사실 이런 구도는 지난 대선 때부터 형성되어 심화된 것이다. 유력 대권주자 둘이 모두 비호감도가 극히 높은 사람들이었고, 그러다 보니 일부 강성지지층을 제외한 많은 시민들은 그 중 한 사람이 싫어 다른 사람을 선택하거나 아예 투표를 포기해야 했다. 대선이 끝난 후 그 두 사람의 지지율은 지속적으로 낮아졌고, 그럴수록 양쪽 극렬 지지층의 무모하고 반시민적인 행태는 도를 더해가는 중이다.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섰던 독일의 나치 친위대 장교 루돌프 아이히만은 전쟁이 끝난 후 도망쳤다가 붙잡혀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 재판을 취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유대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그가 마귀처럼 생겼거나 최소한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고서 재판장에 갔다. 그런데 아이히만은 특별하지 않았고,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명령을 충실히 따른 성실하고 평범한 가장일 뿐이라고 변명했다. 아렌트는 그런 뻔뻔함을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로 그려내고자 했다. 아이히만은 생각 없이 자신의 삶을 살아낸 악한의 전형이었을 뿐이라는 분석이다.

1901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와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가 극에 달했던 시절을 살아야 했던 함석헌은 20세기 우리 역사를 상징하는 사상가이자 실천가 중 하나다. 그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묵직하면서도 상식적인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하면서, 우리 삶과 사회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만들고자 애썼다. 생각하지 않으면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대로 살아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친일파나 독재정권에 부역하는 사람이 되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된다는 경고였다.

함석헌과 아렌트가 함께 강조하는 ‘생각하는 일’은 사실 인간의 고유한 속성이자 인간다움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이기도 하다. 모든 권력이 시민으로부터 나올 뿐만 아니라, 그 시민과 그가 속한 사회의 미래가 시민 자신에게 달려 있는 시민사회에서는 그 중요성이 특별히 부각될 수밖에 없다. 시민들이 생각하지 않고 행동한다면 우리 사회의 미래는 현재의 어두움이 지속적으로 짙어져서 파멸로 내몰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일상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다. 늘 바쁘고, 책과 같은 문자 지식보다는 유튜브와 같은 영상정보에 쉽게 노출되면서 즉각적인 감정 표출에 익숙해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그런 영상정보들은 배후에 숨은 인공지능이 자신의 신념을 강화하는 것들만 선별해 보내주는 것이어서, 세상에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살다 보면 스스로는 세상을 위한다고 하는 행동도 실제로는 세상을 더 어지럽게 만드는 데 기여하는 불행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생각하는 시민’이라야 비로소 우리에게 미래가 있는 이유이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자기교육으로서 시민교육’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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